줬으면 그만이지
세상이 요즘 어수선 그 자체인데 이럴 때일수록 우리 사회는 "어른이 없다."는 자조 섞인 푸념을 내뱉곤 한다. 물론 나도 그런 말을 하지만 이미 내 나이면 어른이 되어야 하는 나이가 아닌가 싶어 나오던 말을 다시 목구멍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다. 반백 넘게 이 세상을 살아왔으니 나 또한 이 세상에 먼지만 한 영향은 미치지 않았을까?
어제 영화를 보러 갔다. '어른 김장하'
우리 동네 가장 큰 영화관의 가장 작은 상영관-60여 석 정도-의 D1과 D2 자리를 예약했다. 영화 시작 시간 10분 전쯤 들어가 우리 두 사람만 앉아서 광고를 보는 내내 아무도 더 들어오지 않았다. 맞다. 우리 두 사람만 독점으로 그 60여 석 상영관을 대관하다시피 영화를 본 거다.
이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이렇게나마 본 소감을 브런치에 올리는 이유기도 하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아주길 바라는 마음...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알려진 건 2년 전 벽두에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입을 통해서였다고 한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이제야 이 영화를 알게 되었다...
영화는 텅 빈 커다란 홀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앉은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기자의 회고에서 시작한다. 첨엔 이 분이 그 선생님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이 분은 7년간 김장하 선생님을 취재하기 위해 서울, 부산, 경남 등 전국 각지로 다니며 선생님 주변 인물 100여 명을 만나고 사진을 찍고 기록한 분이었다. 그렇다면 왜 당사자가 아닌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가며 힘든 취재를 한 걸까? 그 답은 영화 초반부에 잘 나온다.
잠시 후 화면엔 등이 살짝 굽고 코로나 시국이라 마스크를 쓴, 약간 허름한 양복 차림의 한 노인분이 조금 불편해 보이는 다리로 길을 걷는 모습이 보인다. 이 노인 분은 그렇게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이동하시는데 한때 진주에서 제일 잘 나가는 한약방인 '남성 한약방'을 운영했던 엄청난 재력가셨던 분이다.
'남성당 한약방 대표'라는 타이틀 외에 이 분이 관여했던 일들을 조금 적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 학교법인 남성학숙(명신고등학교) 이사장: 1991년 8월 국가에 헌납
- 남성문화재단 이사장
- 진주신문 이사장
- 형평운동기념사업회장
- 경상국립대학교 발전후원회장
- 지리산 살리기 국민운동 영남대표
- 진주 오광대보존회 이사장
- 진주 문화연구소 이사
- 진주 환경운동연합 고문
- 한국 가정법률상담소 진주지부 이사장 등...
이쯤 되면 그 어른, 참 많은 돈을 이용해서 많은 일을 하신 건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위의 활동 중 한두 가지만 예를 든다면 '가정법률상담소 진주지부 이사장' 일을 하실 때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이 살 수 있는 쉼터를 짓고 운영하는 데에 거금을 투척하셨고, '지리산 살리기 국민운동 영남대표'이실 때는 지리산 덕산 댐의 환경영향을 우려하여 설립 반대를 위해 역시나 거금을 지원하고 직접 앞장서 반대 캠페인을 하셨던 분이기도 하는 등 단순히 명함만 판 분이 아니라는 것을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어디 이뿐인가? 문형배 재판관같이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한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장학금을 몇 년 동안 아무 조건 없이 지원하셨고, 어렵거나 힘든 일을 하는 단체에서 도와달라고 하면 거의 거절하지 않고 도우셨다고 한다. 게다가 22년 5월 거의 60년 동안 운영하셨던 한약방 문을 닫고 은퇴하면서 개인 자산 십수 억 원을 경상대에 기부하셨다고 하니 정말 팔면 팔수록 놀랍고 대단하신 어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특히 이 분이 하신 말씀 중 나 포함 많은 이들의 가슴에 와닿은 것은
"줬으면 고만이지, (줘 놓고 갚길 바라면 안 된다.)"
"돈은 똥과 같아서 쌓아두면 악취가 나지만 여기저기 뿌려두면 거름이 된다."
(문형배 재판관이 사법시험 합격 후 감사 인사를 하러 찾아뵈었을 때) "내가 아니라 사회에 갚아라." 등이 있어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감히 그 발뒤꿈치도 닿지 못할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감탄과 존경의 마음, 이런 어른이 정말 계시는구나 하는 깊은 감사의 감정이 휘몰아쳤다. 영화 초반부엔, 태어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남성당 한약방'을 찾아보고 싶었는데 이젠 그럴 수 없으니 이 분의 발자취를 따라 형평운동기념탑과 진주 남성당 교육관-남성당 한약방 건물을 진주시가 사들여 리모델링 공사 중이라고 함-, 진주문고, 극단현장 등을 돌아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