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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얀 Dec 27. 2023

회식 불나방에서 팀의 망나니로

‘신의 직장’ 신입의 자세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입사할 때만 해도 우리 회사는 소위 말하는 ‘신의 직장’이었다. 그중에서도 거의 항상 탑 3 안에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입사 후엔 그런 순위 같은 건 아예 떠올리지도 않게 된다. 신입에게 ‘보이는 게 다는 아니’라도(물론 본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도 있지만..), 선배들에게 이것저것 들으며 서서히 불편한 진실들을 깨닫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입사와 동시에 생전 가본 적 없던 도시에 발을 들여놓고 처음 한 생각은 ‘황량하다’였고(서울은 너무 북적북적하다고 생각하는 친 시골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입사 후 처음으로 보고 느꼈던 건 ‘능력 있고 성격도 좋으신 분들이 많구나(진심이다). 근데 공기업인데 워라밸 무슨 일이지..?’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상사들의 워라밸이 맞춰지지 않았던 건 내 첫 근무지가 본사였기 때문이었다. 어디나 본사가 제일 바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노조를 등에 업은 직원급은 정시퇴근을 할 수 있다는 걸 눈치껏 알게 되었다.


 그런데.. 정시퇴근을 해도 딱히 할 일도 없는데(지금은 훨씬 발전했지만, 그땐 그만큼 시골이었다), 회식을 가면 공짜밥도 먹을 수 있고.. 무엇보다 처음으로 배정받은 팀의 상사들이 정말 좋았다. 그래서 일부러 그들을 기다렸다가 회식을 따라가던 철없는 시절도 있었다. 우리 팀이 회식을 안하면 옆 팀 회식이라도 갔다. 자발적으로 회식을 가는 막내라니! 분명 내가 그랬었는데, 믿을 수가 없다. 내가 봐도 유니콘이다.




 그 시절의 나를 봤던 분을 2년쯤 뒤 다시 같은 부서에서 만나게 되었다. 나중에 그분이 ‘나얀씨에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냐’고 다른 상사에게 물어보셨단 걸 들었다. 그동안 나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팀에서도 여전히 막내였지만, 일단 번개로 잡힌 회식은 무조건 불참했다. 2주 전쯤 고지된 회식은 마지못해 갔다. 가서도 술은 입에도 안 대고 안주와 메인 음식만 축내며, 2차 이상은 불참했다.  평소 코노를 좋아했지만, 상사들이 노래방에 가자고 하면 그냥 도망갔다(진짜로 뛰어서 도망갔다). 미리 고지된 회식이 없는 날은 야근하는 상사들을 뒤로하고 ‘들어가 보겠습니다!’를 외쳤다. 이게 당연한 건가? 신입 MZ의 모습인가?(나도 90년대생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나에겐 2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돌이켜 보면, 회사에 다니는 동안 나에게 ‘패기‘ 혹은 ’객기‘가 생겼던 것 같다. 그리고 불만도 있었다. 이상하게 나는 2인분 이상의 역할을 해야 하는 자리에 자주 배정이 되었다. 나보다 월급도 높고 연차도 오래된 직원들이 6시 땡 하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질 때, 나는 이일 저일 하느라 자정에 사택으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서울과 본사를 왔다 갔다 하며, 일주일에 3일은 본사, 2일은 서울 근무를 하는 생활을 정기적으로 한 적도 있었다(직원급에겐 정말 드문 일이다. 보통은 직원 두 명이 서울, 본사에 나눠 근무하는데 당시 우리 팀엔 직원급이 나밖에 없어서 그랬다). 당연히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다. 그리고 다른 팀으로 옮긴 뒤, 이런 생활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망나니(?)처럼 굴었다.


 모든 번개 회식을 거절하는 나에게, 한 번은 상사 한분이 “왜 안 가? 나얀씨 무슨 약속 있어?”라고 물었는데, 나는 아주 당당하게 “아니요.”이러고는 퇴근해 버렸다. 또 내가 엑셀의 어떤 기능을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이것도 안 배우고 뭐 했어?”라는 투로 말하는 상사에게 “전 아랍어 특기자로 들어왔는데요? 그렇게 엑셀이 중요하면 엑셀 특기자를 뽑으셨어야죠.”라고 쏘아붙이기까지 했다(실화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저대로 이야기했다.) 행사를 준비하다 “왜 면허가 아직 없냐? 운전 안 배우고 뭐 했어?” 하던 상사에게는 “그럼 차장님은 중동 사업하시는데 왜 아랍어도 안 배우셨어요?”라고 대꾸했다.


 하.. 그 당시엔 사이다라 생각했지만, 그냥 조금만 참지 왜 그랬을까 싶다. 우리 회사는 순환보직제라, 보통은 1-2년에 한 번씩 부서가 바뀐다. ‘회사 다니는 동안 같은 사람을 3번은 만난다’는 말이 있는 이유다. 저분들을 다시 만날 때 정말 민망할 것 같다. 그런데 심지어 저분들 모두가 아직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신다. 저 세 분 중 두 분이 휴직 중에도 따로 연락해서 이것저것 챙겨주셨다. 이걸 쓰는 지금도 민망하다. 과거의 내 입을 틀어막고 싶다.

 



 사실 믿는 구석도 있었다. 나의 무기, 외국어. 우리 팀에서 나가는 영어 문서는 거의 다 내 손을 거쳤던 때였으니까. 비즈니스 이메일부터 사장님 명의로 나가는 조의 레터, 영문 사업 보고서까지. 조금 고치든 아예 새로 작성을 하든 내가 손봤다. 팀에서 필요하다면 영어 통역사가 되기도 했다. 실무 회의부터 고위급 미팅까지, 다양한 자리에서 통역을 했다. 그리고 필요하면 법령이나 사업 관련 현지 뉴스 등 아랍어로 된 정보들을 찾았다(나는 중동 사업을 하는 팀에만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오만해서 저렇게 행동한 건 아니다. 처음의 나는 주위 분들의 업무능력과 엄청난 스펙과 그보다 더한 자기 관리에 (마음속으로) 항상 입을 헤 벌리고 다녔으니까. 그러다 두 명이었던 직원 증 선배가 다른 곳으로 발령 나고 내가 혼자 남게 되면서 모든 게 변한 거다.


 이해한다. 나라도 이해해야 한다. 그때의 어렸던 내가, 어리숙하고 눈치만 보던 내가, ‘노조에 말해볼까’ 하다가도 ‘그냥 좀 참지 뭐’ 하던 내가, 지치고 치인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선 저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싸가지는 없어 보여도 저게 나의 가치를 지킬 유일한 방법이었다는 걸. 심신이 힘들었기에 당시의 나는 항상 가드를 올린 상태였다는 걸. 고생했다, 이십대의 나야. 토닥토닥.




 내년이면 복직을 한다고 생각하니 싱숭생숭해서, 회사에 대한 내 마음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일단 스타트가.. 음.. 그리 상쾌하진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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