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가 있던 그 황량한 도시에 내가 업무 외적으로 아는 사람이라곤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입사 동기들끼리 더욱 친해졌다. 우리 모두 같은 처지였으니까.
그러다 동기 오빠 한 명이랑 같은 처에 발령을 받았다. 내가 제일 일을 많이 했던 그 처였다. 부서는 다르지만 같은 처였기에(=근무하는 공간이 같았기에), 상황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 다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자연스레 나의 고충을 그 오빠에게 자주 토로했고, 그 오빠는 연륜과 경험을 바탕으로 상담사 역할을 해 주었다(근데 왜 지금은 내 말 안 들어주냐..?).
그러던 어느 날, 그 오빠가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았다. 본인이 원해서 간 곳이었다. 물론 나도 발령받기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하지만 막상 발령이 나자 아쉽고 허전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오빠와 정이 많이 들었던 거다. 그렇게 장거리 연락을 주고받던 우리는, 결혼 약속을 하고 상견례까지 했다. 그렇게 '그 오빠'는 남편이 되었다.
문제는, 둘 중 어느 한 명이 이동하지 않는 이상 신혼부터 계속 주말부부 생활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동하는 그 한 명은 내가 되어야 했다. 남편은 이동을 할 수가 없는 직군이었으니까.
소속 부서에서 정을 떼려는 듯한(...) 행동을 하고 있는 나였지만, 막상 해외 본부를 떠나려니 너무너무 아쉬웠다. 갑자기 해외 본부의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타 본부에 비해 훨씬 수평적인 분위기, 능력 있고 자기 관리도 철저해 롤모델 삼고 싶은 상사와 선배들.. 심지어 한적한 곳에 있는 본사 건물과 식당(...)도.. 무엇보다도 나의 능력이 필요한 곳, 내가 제대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우리 회사에서 오직 여기, 해외 본부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떠날 결심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해외 본부를 떠나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날부터, 사택에 혼자 있는 밤이면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그렇지만 해외 본부에 계속 있자면 남편과 평생 주말부부로 살아야 할 것이었다. 선택을 해야 했다. 더 많은 시간을 남편과 함께 보낼 것이냐, 해외 본부에서 외국어 쓰고 인정받으며 보낼 것이냐. 가족이냐, 일이냐.
결국 나는 해외 본부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제일 먼저 팀장님과, 처장님께 말씀드렸다. 공교롭게도 당시 처장님이 나에게 '잡일' 질문을 하셨던 면접관님이셨다(입사 후, "나얀이가 그중에서 베스트였어.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은 잘 보잖아. 허허허허" 하는 극찬을 해주셨다ㅋㅋ). 결혼생활 때문이라면 할 수 없지만, 나중에 초시(=첫 시험)에 바로 승진해서 꼭 돌아오라고 하셨다. 나는 그러겠다고 말씀드렸다. 200% 진심이었다.
그 해 인사발령 시기에, 내 이름이 뜬 발령지를 넋 놓고 쳐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너무나 허무했다. 외국어밖에 몰랐던 내가 이제 지사로 가서, 무슨 일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일이든' 해야 한다. 이동을 하기 전에 본부 전체를 돌며 그동안 인연이 닿았던 모든 분들께 인사를 드렸는데, 마지막으로 몇 분들께 인사를 드릴 때 결국 눈물이 터져 나왔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절대 울고 싶지 않았는데... 그만큼 정말 아쉬웠다. 나의 한 세계가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어떤 면에선, 실제로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