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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얀 Jan 01. 2024

이런 팀장님 어디 또 없나요?


 우리 회사에선 인사 이동과 (특히 해외사업부서의 경우) 조직 개편이 잦다. 그 해에도 연말에 조직개편이 있었다. 그 참에 중동사업을 하는 또 다른 부서로 이동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따랐던, 나를 믿고 인정해 주시던 팀장님을 따라간다는 명목 하에(그건 사실이긴 했다).


 

 우리 팀장님은 ‘스마트’라는 말을 사람으로 구현한 것 같은 분이었다. 뛰어난 업무 능력으로 다른 부서, 심지어 다른 지사에까지 명성이 자자하셨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후배들이 롤모델로 삼을 만한 분(하지만 그분처럼 되긴 힘들겠지..ㅠ).


 그리고 입사한 지 수십 년이 되셨음에도, 신입 사원의 마음을 여전히 잘 이해하는 분이셨다. 본인도 입사했을 때 회의감이 들었는데 나얀이는 어떻겠냐(어떻게 아셨지..?) 하시던 분. 그리고 내가 회사에서 만난 직급이 높은 상사들 중 가장 허례허식을 싫어하셨다(나처럼!). 온갖 의전과 행사 속에서도, ‘이런 게 꼭 필요하나? 이건 그냥 보여주기 식 아니냐.’라는 말은 항상 그분의 입에서 나왔다.


 또 가장 반(anti-) 꼰대적인 분이셨다. 팀장님 본인은 술을 드셨지만, 알쓰인 나에게는 아무도 술을 강권하지 못하게 해 주셨다(우리 회사에는 잔을 서로 주고받는 ‘잔돌리기‘ 문화가 있었다). 거래처와의 회식 자리에서도, 그들이 나에게 건네는 술을 대신 마셔주시고(정말 감동이었다!), 사정이 있어 먼저 일어나실 때에는 ‘나얀씨한테 술 먹이지 말고 잘 챙겨주라’고 당부하고 가셨다. 사회 초년생의 어리숙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던 내가, 오는 잔을 거절 못 할까 봐 미리 말씀하신 것 같았다.


 무엇보다, 팀장님은 ‘나 사용법’을 잘 알고 계셨다. 팀장님 몫으로 들어온 기념품 같은 것들 나에게 나눠주기(^^). 통번역을 시키고, 결과를 칭찬하고 인정해 주기. 믿음직스럽다는 말 여러 번 하기. 중간 상사의 불필요한(팀장님과 내가 보기에 겉치레 같은) 지시 커트해 주기. 다른 지사 직원이 나를 ‘통역 아가씨!’라고 부르면, 가서 조용히 ‘통역 아가씨가 아니구요~ 우리 회사 직원입니다. 나얀 대리예요.’라고 귀띔하기(내가 딱 싫어하는 호칭인 거 어떻게 아시고..!).


 첫 팀장님으로 이런 분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다. 그리고 이런 팀장님이 계셨기에, ‘노조에 일이 너무 많다고 말해보라‘는 입사 동기들과 선배 직원들의 조언에도, 이 악물고 맡은 일들을 끝까지 해냈다.




  그런데, 그 팀장님이 외국 지사의 지사장으로 발령받아 가시게 되었다. 그전에 일단 임시로 다른 팀의 팀장이 되셨는데, 나도 그 부서로 따라갔다.


 그리고.. 새로 오신 팀장님은, 뭐랄까.. 배울 점이 많은 분이긴 했지만, 그동안 내가 봐왔던 우리 회사의 다른 팀장님들과 크게 다르진 않으신 분이었다. 거기다 가끔 팀원들이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일 만한 발언을 하셨다. “00 차장, 이런 식으로 일하다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면 어쩔 거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해! 영어는 또 왜 이렇게 못하는 거야? 이래서 해외 사업을 어떻게 해?”

 나 역시 예전 팀장님에게 받던 만큼의 인정을 못 받는 느낌이었다. “나얀 대리, 계약서 번역 얼만큼 했어? 좀 더 빨리 해주면 안 되나?(팀장님, 저 그 일만 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서서히 억지로 부여잡고 있던 싸가지(?)와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일터에서든(일을 열심히 해서) 회식에서든(잘 웃고 많이 먹어서..?) 사랑받는 ‘분위기 메이커’였던 내가, 망나니가 되어버렸다. 


 새 팀에서도 막내였지만, 번개로 잡힌 회식은 무조건 불참했다. 2주 전쯤 고지된 회식은 마지못해 갔다. 그때도 1차만 갔고, 2차 이상은 불참했다(보통 직급이 높으신 분들이 그렇게 하는데, 나도 그랬다).  평소 코노를 좋아했지만, 상사들이 노래방에 가자고 하면 그냥 도망갔다(진짜로 상사들이 보는 앞에서 뛰어 도망갔다. 정말 가기가 싫었다ㅠ). 미리 고지된 회식이 없는 날은 야근하는 상사들을 뒤로하고 ‘들어가 보겠습니다!’를 외쳤다. 이게 당연한 건가? 신입 MZ의 모습인가?(나도 90년대생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나에겐 2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모든 번개 회식을 거절하는 나에게, 한 번은 상사 한분이 “왜 안 가? 나얀씨 무슨 약속 있어?”라고 물었는데, 나는 아주 당당하게 “아니요.”이러고는 퇴근해 버렸다. 또 내가 엑셀의 어떤 기능을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이것도 안 배우고 뭐 했어?”라는 투로 말하는 상사에게 “전 아랍어 특기자로 들어왔는데요? 그렇게 엑셀이 중요하면 엑셀 특기자를 뽑으셨어야죠.”라고 쏘아붙이기까지 했다. 행사를 준비하다 “왜 면허가 아직 없냐? 운전 안 배우고 뭐 했어?” 하던 상사에게는 “그럼 차장님은 중동 사업하시는데 왜 아랍어도 안 배우셨어요?”라고 대꾸했다.

 전부 실화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저대로 이야기했다.




 돌이켜 보면, 내가 정신줄을 부여잡게 도와주시던 팀장님이 가시고 나니, 나를 보호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던 것 같다. 저렇게 행동한 건 아직도 민망하다. 저런 과도기적(?) 시기를 거친 뒤에는 말을 저렇게까지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때 그나마 나의 정신줄을 붙잡아준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구) 입사동기 오빠, (현)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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