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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얀 Jan 01. 2024

대리님과 통역사님 사이, 그 어딘가에서


 

 일주일의 자유 시간 후, 출근을 위해 사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드디어(?!) 출근이다!



 첫 출근날. 프리랜서로 일을 해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부푼 마음을 안고 가서, 중동 사업을 하는 팀에 배정되었다. 그런데 거기서 처음 들은 말은 이랬다. "어, 아랍어를 한다고? 근데 아랍어 쓸 일 많이 없을 텐데.. 우리 팀에서 아랍어 인력 요청한 것도 아닌데..? 혹시 영어는 잘해?" ('네, 좀 합니다'라고 하긴 민망해서, 읽고 쓸 줄은 안다고 대답했더니) "음.. 읽고 쓸 줄 아는 걸로는 부족한데..."


 상사 한 분의 저 말이 이후 내 회사생활을 압축해서 들려준 것과 같았다. 처음에는 정말로 아랍어를 쓸 일이 없어서, 현지 동향을 확인한다든지.. 하는 등 아랍어가 필요한 일을 억지로 만들다시피 해야 했다. 그러다 간혹 아랍 쪽 거래처나 발주처에서 방문을 하면, 그땐 예우차원에서(!) 아랍어를 썼다(물론 그들은 영어를 잘했다).



 그러다 한 번은 옆자리 선배의 전화를 당겨 받으면서 영어로 통화를 하게 됐고, 그 이후 내 이중전공이 영어통번역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런 뒤로는 팀 내 각종 문서.. 그러니까 매일매일의 업무 메일부터 사장님 명의로 나가는 조의 레터, 영문 사업 개요나 보고서, 심지어 계약서까지(작성 후 사내 변호사의 검토를 받긴 했다), 그런 것들이 나의 손을 거쳐 나가게 됐다. 조금 수정을 하든, 아예 처음부터 번역을 하든, 어쨌든 내가 손을 봤다. 외국에서 손님들이 오시는 날에는 영어 통역사가 되어야 했다. 실무 회의부터 고위급 면담까지, 다양한 자리에서 통역을 했다.


 그래, 여기까진 좋았다. 아랍어든 영어든, 통번역은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통번역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진짜 '얼마든지' 했다. 직원들 대다수는 금요일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갔다가 일요일 저녁에 다시 본사가 있는 도시로 모이곤 했는데, 중요한 레터(그리고 부장님의 부탁이 있는 경우)는 그 회사 셔틀에서까지 번역을 했었다. 평일에도 옆 팀의 고월급 고연차 선배 직원들이 6시 땡 하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질 때, 나는 자정까지 남아서 번역을 마무리했던 적도 있었다. 통번역을 실컷 할 수 있는(…) 해외 출장도 여러 번 다녔다. 어느 해 한여름에는 일주일 동안 사우디 출장을 다녀왔다가, 그 다다음 주에 또 일주일 간 UAE-바레인 출장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괜찮았다. 어떻게 보면 상대적으로 적은 월급에 초과수당도 받지 않는 '열정 페이' 였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통번역을 할 때면 언제나 배우는 게 있고(하다못해 단어 하나라도), 나는 그런 새로움과 배움을 즐겼으니까. 그리고 결과물에 만족하는 클라이언트(=상사) 들을 보면 가슴 깊이 뿌듯함이 차올랐다. 역시 통번역사가 천직이었던 걸까.


 문제는 내가 '통번역'만 하는 직군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언어 특기자로 입사하기는 했지만, 나는 다른 직원들과 같았다. 즉, 직원들이 하는 모든 잡일을 나도 동일하게 해야 했다. 그리고 잡일은 끝도 없었다. 전표 처리 등 온갖 잡다한 회계 처리부터 각종 행사와 의전 챙기기, 출장 시 숙소나 교통편 예약하기, 사무실 간식이나 비품 채워놓기 등등.. 면접관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게 되었다. 왜 그런 걸 물어보셨었는지도.




 중요한 발주처의 귀빈이 방문한 주간이었다. 우리 팀 전체가 동원돼서, 그들을 따라 서울을 누비고 다녔다. 10명 가까이 되는 팀 전체가 몇 박 며칠 동안 서울 출장을 가야 하는 대규모 행사였다. 우리 회사의 여러 지사 견학부터 팀 현안 관련 미팅, 빠질 수 없는 오/만찬까지 다양한 행사가 마련돼 있었다. 나의 역할도 중구난방이었다. 당시 나는 행사 뒤에서 대기하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스태프이자, 평소 이동 및 지사 견학 시에는 통역사였다. 만찬에서도 통역과 팀의 막내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정이 마무리될 무렵은 어마어마한 회계 처리를 혼자 감당해야 했다. 사실 원래는 한 팀에 직원급이 2명은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우리 팀엔 직원이 나 혼자 뿐이었다. 그게 더 억울하고 힘들었다.


 긴 서울 출장의 마지막 날은 정말 녹초가 되었다. 숙소 침대에 누워 있는데, 불현듯 면접 자리에서 나왔던 '잡일'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랬구나. 그때 면접관님이 묻고 싶으셨던 건 '잡일만 해도 버틸 수 있냐'가 아니라, '잡일과 통번역 다 해낼 수 있겠냐' 였을 거다. 고용 불안을 체감하지 않으며 통번역을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그 안정성을 위해선 온갖 잡일을 해내며 통번역까지 하는 '대리님(우리 회사에선 직원급을 통상 이렇게 부른다)'이 되어야 했다.




 이렇게 계속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야지, 뭐 어쩌겠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아직까진 프리랜서 때의 원인 모를 불안감이 생생했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 이 소속감이 주는 안도감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엄청난 업무량은 버거웠다. 1년 넘게 이렇게 살았으니, 이제 좀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을까. 우리 회사의 장점이자 단점인, 1-2년마다 있는 부서 이동의 기회를 노리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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