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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얀 Dec 31. 2023

세 통의 낯선 전화 (feat. 처음 보는 지역번호)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하다. 그렇게 동시통역사가 되고 싶었는데, 막상 되고 나니 그전까진 생각지 못했던 또 다른 걸 바라게 되었다. 고용 안정성.  



 사실 그 공기업의 해외사업 부서에서 아랍어 능통자를 뽑는다 해도, 통역사로 사는 것만큼 아랍어를 쓰진 못하리라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우선 중동 쪽 사업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아랍어만 쓰는 것도 아니니까(영어를 잘하는 아랍인도 많다). 양쪽 다 영어를 꽤 한다는 가정 하에, 영어를 쓰면 다이렉트로 소통이 가능한데 굳이 통역사를 거쳐서 시간을 두 배로 쓰려 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최소한 영어는 많이 쓸 것이고, 아랍어가 필요할 때도 분명히 있을 것이었다.  


 원서 마감일 하루 전에 자소서를 포함한 서류 작성을 완료했다. 그리고는 도서관에 가 있었다. 학교에 다닐 땐 일부러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공강시간 때울 때를 제외하고.. 하지만 2학년때부터는 쭈욱 기숙사에 살게 되어서, 공강에 굳이 도서관에 갈 필요도 없었다),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나니 오히려 도서관을 더 찾게 됐다.  


 거기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처음 보는 지역번호로 걸려온 전화라 무시할까 하다가, 받아야 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어 받아보았다.  


 “안녕하세요. (회사명) 인사담당잡니다. 혹시 이 자리가 9-6 근무하는 정규직 자리인 거 알고 지원하셨나요? 근무지는 내부 사정에 따라 (본사) 일 수도 있고 서울이 될 수도 있구요."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분은 내 영어점수, 자격사항 관련 몇 가지를 더 물어보신 뒤("네, 자소서랑 지원서에 다 써 놨습니다." "아 네, 그건 읽어 봤는데요~" 뭐 이런 대화가 오갔다) 전화를 끊으셨다. 처음엔 뭐지? 지원서를 잘못 썼나?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인사담당자가 지원서 오류를 일일이 지적해 줄 정도로 한가할 리가 없고(오류를 지적하지도 않았고).. 만약 오류가 있다면 그냥 서류 탈락시키면 그만 아닌가. 그렇다면, 이 회사에서 나를 알아본 걸까??!!


 살짝 전율이 흘렀다. 얼굴도 모르는 분이지만, 어쩌면 나의 가능성을 알아봐 주셨을 그분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 실망하는 걸 못 참는 것이 내 고질병이라.. 지금 생각하면 웃긴 일이다. 그 인사담당자분은 나를 아는 사람도 아닌데, 내가 시험이나 면접을 못 본다고 뭐 얼마나 실망을 하겠는가? 그리고, 설사 실망을 한들 알지도 못하는 사인데 무슨 상관인가? 근데 그 당시엔 그분을 실망시키지 않는 게 내 지상 과제나 되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 길로 당장 도서관에 있는 NCS 문제집을 있는 대로 빌려서 풀어봤다. 그리고 면접 준비도 했다. 당시 내가 지원한 전형은 NCS부터 전공시험, 면접까지 하루에 다 마치는 전형이어서, 어떤 공도 떨어뜨리지 않고 저글링을 잘해야 했다.  




 얼마 뒤, 서류 합격자 발표일이었다. 갑자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저장이 되어 있진 않았지만, 낯익은 번호였다. 전의 그 인사 담당자분이셨다. 서류 합격자 발표가 됐으니 확인해 보라는 연락이었다. ‘정말 친절하신 분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웹사이트를 확인했다. 떨어진 사람에게 연락해서 합격자 발표를 조회해 보라고 하진 않으셨을 테니,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면접준비에 더욱 매진했다.  


 면접 날, 긴장이 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을 거다. 나와 같이 시험을 본 동기 언니는 태어나서 제일 긴장을 많이 한 날이었다고 했다. 너무 떨려서 면접 때 말이 제대로 안 나오기도 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는 아니어서, 발표를 나름 잘 마쳤다.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면접이 끝나갈 무렵,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시는 면접관님이 물으셨다. “근데 여기 들어오면 앞으로 몇 년은 잡일만 많이 해야 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복선이었다..)


 당연히 괜찮다고 했다. 진심이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회사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앞으로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되어도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잡일 몇 년 하는 거? 팀의 막내라면 당연한 거 아닌가? 회사에 들어가서 그 정도도 안 하는 사람이 있나?

 



 최종 합격자 발표일에도 먼저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그땐 할아버지 댁 화장실에 있었는데(..) 예의 그 전화번호가 폰 화면에 떴다. '축하한다, 그런데 채용검진도 받고 뭐도 한 다음에.. 당장 일주일 뒤에 입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나의 불안정한 빌드업 기간이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일주일 뒤면 나는 안정적인 직장에 소속된다. 그렇게 바라던 취업에 성공했다. 근데, 막상 입사를 하려니 일주일 뒤가 아니라 한 한 달쯤 뒤였으면 좋겠다.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이렇게나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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