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얀 Dec 26. 2023

너, 브람스 좋아해?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문장을 처음 접한 건 작년 동명의 드라마를 통해서였다. 당시만 해도 나는 이 문장이 소설 제목과 같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클래식 음악 관련 드라마라서 제목을 이렇게 지었구나. 나름 참신한 제목인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다 검색을 통해서 사실은 이 문장이 이름은 언뜻 들어본 것 같은 '프랑수아즈 사강'이라는 작가의 소설 제목에서 따온 것이겠구나, 라는 걸 깨달았고, 왠지 귀여운 제목의 이 소설이 읽어보고 싶어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작가가 반드시 말줄임표를 써 달라고 했단다)>에는 다른 유명한 고전 소설들이 으레 그렇듯 당시의 사회를 축소해 놓은 듯한 비유와 암시가 있다거나, 그 시대의 복잡한 문제가 제기되어 있다거나 하지는 않다. 그보다는 세 명의 주요 등장인물인 폴, 로제, 시몽의 관계와 그들의 심리 묘사가 줄거리의 주를 이룬다. 그래서 술술 읽힐 것만 같았던 소설이다. 그런데 막상 읽기 시작하자 의외로 중간 중간에 턱턱 막히는 부분들이 많았다. 세 사람이 독백의 형태로, 또는 상대의 마음을 추측해보는 형태로 그들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는데, 그 묘사가 너무나 적확하게 들어맞아서 마치 내가 쓴 글 같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 누구나 자신을 폴에게, 로제에게, 그리고 시몽에게 대입해보게 될 것 같다. 특히 그 중 가장 유사한 사람에게 더욱 정이 가고 더욱 이입을 할 것이다. 내가 십년 쯤 전에 이 소설을 읽었다면 나는 성별을 떠나 시몽에게 가장 동질감을 느꼈을 것 같다. 그 즈음엔 나 역시 누군가를 열과 성을 다해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그 사람 생각에 떨어져 있으면 핸드폰만 붙들고 있고, 만났을 땐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 기분을 사람으로 구현한다면 시몽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 소설을 읽은 나는 시몽을 보며 잠깐 그 때의 간질간질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지만,  결국엔 폴에게 감정 이입을 한다.




 6년째 연애중인 로제는 폴을 외롭게 내버려 둔다. 하룻밤 머물기를 바라는 그녀의 마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자유를 갈망하며 그냥 훌쩍 떠나버리기도 하고, 일이 바빠 폴과의 저녁 약속을 취소해 버리기도 하며, 심지어 굳이 일 때문이 아니라도 그냥 연락이 없다가 마음 내키면 저녁 8시쯤 '뭐해?' 하고 연락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권태기에 접어든 연인의 모습이다. 이럴 때 폴을 지탱해 주는 것은 서로의 취향을 이미 너무나도 잘 알며, 심지어 말하지 않고 표정만 보더라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정도의 익숙함이다. 이 익숙함이란 테두리가 다른 사람의 접근을 칼같이 차단하는 방어벽 역할을 하기 때문에, 폴은 자신의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열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가 어렵다. 이는 자신만을 열렬히 사랑하고, 자신을 위해 모든 걸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완벽한 외모의 시몽이라는 인물이 등장해도 마찬가지다. 시몽은 절대 폴을 외롭게 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정 반대다. 폴을 오후 6시에 만나기로 했다면, 시몽은 오후 2시부터 떨리고 설레는 사람이다. 폴과 잠시라도 떨어져 있지 않으려 하며, 불가피하게 떨어지게 되면 매일같이 연락하는 건 기본이다. 잠깐이라도 그녀를 보려고 폴의 집 앞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리기도 하고, 폴이 없을 땐 그녀의 머플러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기도 한다.  폴에게 로제라는 애인이 있다는 걸 알아도 막무가내다. 이쯤 되면 시몽은 폴을 사랑하는 걸 넘어서 숭배하는 것 같다. 세상에 자신을 이 정도로 사랑해 주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물론, 기본적으로 호감가는 사람이 그랬다는 전제 하에). 더군다나 현재 연인이 권태기에 빠진 정도를 넘어서 다른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게 된 폴은 시몽의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외로움을 해소하고, '자신이 그에게 준 행복을 공유하고 싶다(107쪽)'는 생각까지도 한다.



"여기 내 몸이 있어요. 내 열정과 애정이 있어요. 이것은 내게는 아무 소용이 없지만 당신에게 준다면, 나로 하여금 다시 사는 맛을 느끼게 해 줄지도 모르죠." - 폴의 독백, 107쪽



 실제로 폴은 시몽과 로제 사이에서 여러 번 갈등을 한다. 그 심리적 갈등이 가장 명징하게 드러난 부분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시몽의 질문을 되새기는 장면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가 아직도 갖고 있기는 할까? - 60쪽



 이 질문의 '브람스'는 단순히 음악가 브람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브람스와 정 반대 스타일의 '바그너'를 좋아하는 애인을 둔 폴에게 '브람스'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곱씹었을 때 폴은  자신이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것, 즉 '로제와 나는 이대로 괜찮을까?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나 새로운 시작을 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같은 질문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사는 이 질문에 대해 폴이 내놓은 답을 보여준다.



"그런데 내가 브람스를 좋아하는지 어떤지 더 이상 알 수가 없더라고……. 믿어져? 내가 브람스를 좋아하는지 어떤지 더 이상 알 수도 없다는 게……."  - 시몽이 로제에게 건네는 말, 74쪽



 결국 폴은 자신의 마음을 딱 정하지 못하고, 계속 갈팡질팡한다.  자신이 '브람스'를 좋아한다고, 좋아하지 않는다고도 명확히 말할 수 없는 상태. 즉, 로제와 함께할지, 시몽과 함께할지 확언할 수가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로제 역시 그런 폴의 마음을 직감한다.



"브람스 얘긴 집어치워……."
"하지만 이건 브람스에 관한 얘긴걸……."    - 로제와 폴의 대화, 74쪽



 '브람스'로 상징되는 폴과 로제, 또는 폴과 시몽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로제는 듣기 싫어하지만, 폴은 그에 대해 계속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다. 같은 페이지(74면)에 등장하는 이 장면과 대사들이 폴의 마음을 너무나 잘 대변해 주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그렇지만, 서른아홉의 폴은 결국 로제가 주는 익숙함과 권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시몽과 꼭 붙어 여러 나날을 보내던 그녀는 결국 로제에게 돌아가기로 한다.


그녀는 좀 더 울고 싶기도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싶기도 했다. 익숙한 그의 체취와 담배 냄새를 들이마시자 구원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울러 길을 잃은 기분도.   - 156쪽



로제와의 익숙함, 편안함은 폴에게 웃음과 구원을 주지만, 또다시 고독하고 외로운 삶을 살아야 할 자신을 생각하면 울고 싶고, 길을 잃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그 '웃음과 구원'이 외로움을 이긴다. 폴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로제도 처음엔 그녀를 얻기 위해 전전긍긍했던 시절이 있다는 것을. 지금은 자신의 열렬한 구애자인 시몽도 결국엔 자신에게 외로움을 선사할 것임을. 그 과정을 또 겪느니, 이미 모든 걸 거쳐서 서로에게 익숙함을 주는 로제와의 관계에 그대로 머무르는 게 낫다는 것을.





  책을 덮고 나니 새삼 프랑수아즈 사강이 왜 심리 묘사의 대가라고 일컬어지는지 알 것 같았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무려 24세에 쓴 작품이라고 한다. 30대가 된 지금에서야 폴을 이해할 수 있게 된 나로서는, 그 나이에 이렇게 다른 나이대의 설렘과 권태를 한번에 담은 작품을 썼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이 정도의 통찰력과 재능을 가진 작가였다니, 프랑수아즈 사강의 다른 소설들도 전부 읽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그 전에, 나 자신에게도 한 번 물어보고 싶다. 아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정신없는 지금의 나는 폴처럼 연인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일은 없지만, 그만큼 나 자신을 잊거나 잃고 있는 건 아닌지.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일부러 피하고 있었던 건 없는지. 이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의미에서.


“브람스를 좋아해?”





*22년 민음사 주관 리뷰대회 최우수상 수상작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