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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연 Feb 19. 2018

감정노동, "저 사람들은 친절해야해. 직업이니깐"



커피 한 잔을 주문해도, 어떤 말투로 주문하느냐에 따라 커피 값이 달라진다는 커피가게가 있다. 이 커피가게 주인은 커피를 주문하는 말투를 세 단계로 나누어 각각 커피값을 다르게 받겠다고 했다. 예를 들어 “스몰 사이즈 커피요 Small coffee”라고 말하면 5달러를, “스몰 사이즈 커피 주세요 Small coffee, please”라고 말하면 3달러를 “안녕하세요, 스몰 사이즈 커피 한 잔 주세요 Hello, one small coffee, please”라고 말하면 1.75달러를 받겠다는 것이었다. 


이 커피 가게는 미국 버지니아주 로어노크시 그랜드 빌리지에 위치한 ‘컵스 커피 앤 티CUPS Coffee & Tea’라는 가게다. 주문하는 말투에 따라 달라지는 커피 값. 신선하기도 하지만 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게 하는 가게다. 대체 이 카페 주인은 왜 이런 안내문까지 붙이면서 커피 가격의 차별화를 꽤했던 것일까? 


이 가격판에 대한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바로 카페 직원이었다. 커피를 주문하면서 계산대 종업원을 무시하고, 무례하게 커피를 주문하는 손님들의 태도가 부당하다고 생각해 일종의 무례세를 부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커피 주문을 받는 사람일 뿐, 손님의 부하직원도, 종도 아닌데 너무 당연하게 자신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그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인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존중으로 커피를 주문하고 주문받을 수 있는 문화를 만들고 싶었다


더 놀라운 건 이러한 아이디어를 수렴한 카페 사장이었다. 그는 직원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 이와 같은 가격 차별 커피 값을 만들었다. 카페는 손님들에게 맛과 질이 보장된 커피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이지, 그들의 무례함을 받아들일 의무까지는 없다는 것이었다. 직원들에게 손님에 대한 서비스를 강요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편에 서 이 같은 가격표를 만들게 된 것이다.


카페 사장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실제 이 가격표가 세워진 이후 5달러짜리 커피를 마신 손님은 없다고 했다. 카페를 찾는 사람들도 이 가격표를 보며 오히려 자신들의 주문 태도를 되돌아보게 하고, 혹시나 그들을 인격적으로 무시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검열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카페 분위기는 훨씬 좋아졌고, 이들의 가격표에 지지를 표하는 손님들도 늘어났다고 했다. 주문하는 자와 주문받는 자, 이 사이에는 역할의 차이만 있을뿐 인격의 차이는 없다는 것을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다.    




감정노동은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자신의 감정을 고무시키거나
억제하게 한다. 승무원들의 경우, 승객들이 즐겁게 안전한 곳에서 충분 한 배려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노동은 정신과 기분이 잘 조절되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각자의 개성을
구성하는 본질이라고 여기는 부분까지도 다 내어 주어야 할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_ <감정노동> 21쪽     



우리들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스스로의 감정을 어느정도 관리해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서비스직은 말할 것도 없고 크게보면 일반 사무직에 종사하는 내게도 감정노동의 경험은 있다. 가령, 거래처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싫어도 좋은척, 맛 없어도 맛 있는 척, 하기 싫어도 하고 싶은 척 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깐. 


사무실로 걸려오는 소비자들의 항의성 전화는 또 어떤가. 내가 하지도 않은 일에 일단 "죄송합니다"라고 말해야 하고, 고성과 욕설을 하는 전화도 끝까지 붙잡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해야 한다. 지금은 그래도 좀 익숙해졌지만 신입 시절엔 전화를 끊고 화장실로 달려가 운 날도 있었다. 그 모든 비난이 나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처럼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감정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커피점 사례에 등장하는 손님에게 주문을 받아야하는 종업원, 승무원, 콜센터 직원, 매장 판매원 등은 물론이고 사무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고객을 접촉하지 않더라도 동료, 상사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감정노동을 해야한다. 가기 싫은 회식 자리에가서 웃고 떠들며 즐거운 척 술을 마시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지시와 트집을 잡는 상사 앞에서 싫은 내색 없이 경청하는 척 하는 것도, 얌체 같은 짓을 하거나 일을 미루는 동료를 보고서도 못본척 아무일 없는 척 하는 것도 결국은 나의 감정을 조절하는, 감정노동의 연장선상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하고 있는 일이기에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이 감정노동이 부당하고, 괴롭고,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싫으면 안 하면되고, 보기 싫으면 안 보면 그만이었지만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그렇지 않기에 30년가까이 유지해온 그 태도까지 바꾸며 우리는 버텨내고 있다. 때론 원래 나의 성격은 어땠었지라는 의문이 들고, 나는 원래 어떤 말투를 쓰는 사람이었는지가 헛갈리며, 내가 좋아하던 음식이 무었이었는지까지 까먹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 감정노동이, 내가 받아야 할 위치라고 생각되는 자리에 있게 되면 부당한 것이 아닌 소비자의 권리로 바뀌어버린다. 


비싼 티켓값을 지불하며 비행기를 탔는데 승무원이 나의 요구를 바로 받아주지 않거나 불편하게 한다면, 간만에 기분 내려고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하는데 주차요원이 불편한 곳에 주차 지시를 하고, 매장 직원이 귀찮은 듯 나를 대한다면 뭔가 손해를 본 느낌이 든다. “아니, 내가 내 돈 주고 하면서 이따위 대접을 받아야 한단 말이야?” 라고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돈을 소비하는 주체가 될 때면 그 돈에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강한 의식 속에 더욱 더 폭력적인 감정노동을 강요하게 된다. 같은 값이라도 그 돈을 받을 때와 그 돈이 나갈 때 느끼는 상대값을 차이는 엄청나니깐. 내가 쓸 때는 그 돈이 받을 때보다 더 크게 느껴지니깐 말이다. 


특히 서비스업으로 분류된 업종에서 돈을 소비할 때는 더더욱 강력한 친절함의 잣대를 들이댄다. 매장 직원, 종업원, 승무원, 콜센터 직원, 호텔직원, 경비원 등등. 기본적으로 ‘서비스’가 정가에 포함되어 있다고 느껴지면 그들의 친절이 당연시 되고, 때로는 당연함을 넘어 과도한 요구까지 하게 된다. “손님은 왕이잖아”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말이다.  

 

그런데 상황을 바꿔서, 만약 나에게 월급을 주는 사장이 그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내가 너한테 돈까지 주면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야” 라고 말이다. 그것이 당연하고, 사장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가끔 같은 을끼리 갑질하려한다. 물론 정말로 부당한 원칙으로 소비자의 권익을 훼손하는 기업도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것을 결정한 이해관계자나 기업 당사자에게 잘못이 있지 그것을 수행하는 것을 대가로 고용된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애꿎은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나와 같은 그저 한 사람의 월급쟁이에게 분풀이하고 감정노동을 강요할 때가 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어서라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끼리 헐뜯고 상처주는 것이 최선일까? 그렇게 해서 정말 나아질 수 있을까?


“저 사람들은 그걸로 월급 받는 거니깐 그렇게 해도 돼”라고 생각한다면, 나도 어느 순간 그 화살을 되받게 될 것이다. “너도 월급받으니깐 까라면 까”라고 말이다. 그건 진정으로 부당함을 바꾸고 불합리함을 바로 잡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을끼리 서로 물고 뜯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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