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라하는 여자 래퍼들이 모여 음반 트랙을 걸고 벌이는 경연 <언프리티 랩스타>. 후속 시즌이 이어질 만큼 큰 인기를 얻었던 이 프로그램은(물론 뒤로 갈수록 재미는 덜 해졌지만) 방송이 나갈 때마다 수많은 기삿거리를 낳았고, 지금도 여러 프로그램에서 만날 수 있을 만큼 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화제를 낳은 시즌1은 아직도 화자가 될 만큼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시즌 1의 첫 번째 경연은 8명의 래퍼가 노래 한 곡을 파트로 나누어 연습하고, 원테이크 뮤지비디오를 찍는 미션이었다. 원 테이크란 카메라 끊김 없이 한 번에 찍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중간에 누군가 실수를 한다면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했다. 모두가 최상의 컨디션으로 한 번에 찍어야 했기에 각자도 잘 해야 했지만 함께 하는 동료에 대한 이해와 배려도 필요한 미션이었다. 그러니 미션 중 불협화음이 일어나는 건 당연지사. 그 우여곡절을 보는 것이 이 미션의 맛(?)이었다.
그렇게 어렵고도 잔인한 미션을 마친 8명의 래퍼.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잔인한 미션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바로 미션을 마친 며칠 뒤 다시 모여 완성된 뮤직비디오를 보고 각자 가장 잘한 래퍼와 가장 못한 래퍼를 뽑는 것. 그리고 그렇게 기록된 투표용지는 MC에 의해 모두의 앞에서 불려졌다. 누가 나를 지목했는지 알 수 있게 한 것이었다.
그날 미션에서 가장 못한 래퍼로 1위를 차지한 래퍼는 '제시'였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던 그녀는 최종 투표 마감 결과 자신이 가장 못한 래퍼로 호명되자 "잠깐만요"를 외치며 진행을 멈췄다. 모두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는 심상치 않았다. 연이어 제시는 그 유명한 대사를 외쳤다.
“니들이 뭔데 날 판단해.
We are not a team. This is competition. right?”
당연히 평가를 받으러 나온 경연 자리에서, 함께 치른 미션을 바탕으로 서로가 서로를 평가하는 룰 자체를 거부하는 제시의 발언은 모든 사람들을 당혹시켰지만 제시는 자신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래퍼만의 방식으로, 프리스타일 랩으로 자신의 진심을 담아 말했다. 충분히 논란이 될 수 있는 사건이었지만 오히려 동료들은 그녀의 랩에 압도되었고, 시청자들은 이 에피소드를 통해 제시가 실력 있는 래퍼임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의를 제기한 랩도 래퍼다웠고, 그 이후 보여준 그녀의 실력도 결코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인정할 수 없는 '니들이', 최소한 니들보다 실력 있다고 생각하는 '나를',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평가' 할 수 있는지. 하나의 완성된 프로젝트를 만들기 때문에 화합과 배려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사실상 트랙을 걸고 그것을 따내기 위해 '경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것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제시는 평가 주체의 자질에 대해, 평가의 기준에 대해, 그리고 이 경연 시스템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내게도 매년, "니들이 뭔데 날 판단해"라고 외치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바로 인.사.평.가.시.즌.
연봉 인상과 승진이라는 목표 아래 모두가 매일 경쟁을 하고 있는 회사는 매년 '인사평가'라는 것을 만들어 서로를 평가하고, 점수를 매긴다. 평가의 주체는 내가 그 자질과 능력을 인정 하든 안 하든 먼저 승진한 몇몇에 의해 이루어지고, 때로는 동료까지 내 평가의 주체로 만들어 동료들의 평가까지 받는다.
평가의 기준은 전년도에 세운 '목표 설정'과 회사가 만들어 놓은 수십 가지 기준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모든 기준을 압도하는 단 한 가지의 기준도 있다. 바로 회사의 '매출'. 그게 정말 직원들의 노력 때문이든, 경영진의 올바른 판단 때문이든 매출이 좋으면 모두가 좋은 평가를 받고 그 반대라면 아무리 잘 했어도 좋은 평가를 받기 쉽지 않다.
대학만 졸업하면 성적표를 받을 일은 없을 거라 좋아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또는 반기별로) 성적표를 받아 든다. 그나마 학교 때 받는 성적표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기에 예상 가능하고, 너무 명백한 점수가 쓰여 있기 때문에 자존심 상할 일은 없었다. 내가 공부를 안 했으니 점수를 못 받는 것이고, 시험을 못 봤으니 그 점수를 받은 것이니깐. 그런데 이 인사평가는 그렇지가 않았다.
속해 있는 사업부에 따라, 맡은 업무의 성격에 따라, 평가 주체에 따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 평가가 이루어졌다. 한 개인의 노력과 실력만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아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평가라는 것 자체를 무시해버리면 되지 않겠나 싶지만 학교 성적표와 달리 이 평가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걸려있다. 정규직 계약, 승진, 연봉 인상, 인센티브 등등. 그러니 무시해버리기엔,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로 넘겨버리기엔 가혹하지만 어떻게든 잘 받아야 하고, 그래야만 하는 간절한 것이 된다.
“지연 씨는 좀 이기적인 것 같아요. 냉정하고 차갑다고 해야 하나? 자기 일은 잘 하는데, 너무 딱 자기 일만 하잖아요. 동료들도 도와주고 주변에 관심도 가지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동료 평가들도 대부분 그런 의견이 많았어요.”
4년 차 때였나. 평가 시즌이 끝나고 팀장 면담을 하는데 팀장이 나의 이기적임(?)을 문제 삼으며 개선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해 했던 업무에 대한 평가, 성과에 대한 리뷰를 하며 부족했던 것과 잘 했던 것들 말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담담히 잘 듣고 있었는데, 개인적인 부분을 이야기하자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난 참지 못하고 "각자가 잘 하면 도와줄 일도 없고, 그렇게 팀이 잘 돌아가며 성과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 아닌가요? 우리가 동아리도 아니고요"라는 되바라진 말을 뱉어냈고, 팀장에게 '역시 얘는 이기적이야'라는 확신만 심어준 채 면담은 종료됐다.
참 신기했던 건 그 회사에서 대여섯 번의 인사평가를 하며 매번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팀장이 바뀌고 동료가 바뀌어도 난 늘 꼼꼼하지 못하며,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더 신기했던 건 이직을 하고 그 회사에서는 난 정반대의 평가를 받았다. 하는 일의 방식과 스타일도 그대로고, 나라는 사람도 그대로인데 평가는 달랐다. 그때 깨달았다. 평가라는 게, 아무리 객관적인 기준을 만들고 수치를 만들더라도 평가 주체의 주관적 성향에 의한 판단과 그로 인해 세워진 첫인상이 그 회사에서 받게 될 앞으로의 모든 평가를 결정한다고 말이다.
'일을 잘 한다'는 것의 객관적인 기준이 있을까? 10여 명의 구성원이 꾸리는 회사가 아니라면, 조직과 시스템의 힘으로 굴러가는 기업에서 한 개인의 능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발현될 수 있으며, 얼마나 회사 매출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시스템에 잘 스며들고, 윗사람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며, 모든 것의 우선순위를 회사에 두고 있는 사람이 결국 회사에서 평가하는 '일 잘 하는 사람'인 것은 아닐까?
인사평가가 객관적일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정답을 맞히고 틀리는 오엑스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닌 목표 설정에 따른 평가를 한다는 데 있다. 일반적으로 '목표'란 내가 가진 능력과 노력으로 달성 가능할 법한 것을 가리키는데, 회사에서는 꿈의 숫자를 '목표'라 부른다. 가령 지난해 매출 20억 규모의 팀에서 올해는 목표를 30억을 잡아 달성 방법을 마련해오라는 식이다.(이건 실제다. 인원 충원도, 아이템도 없는 상황에서 내게 그걸 짜오라고 했다. 목표는 정해진 거니 바꿀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니 목표 달성에 따른 평가 자체가 무의미하다. 모두가 달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평가는 그나마 나은 매출을 달성한 팀과 사람, 그 외 노력이나 근태, 팀장 마음에 드는지의 여부에 따라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불합리함은 거기서 나온다. 나의 노력 여부가 공정하게 평가되기보다는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부분들로 평가된다는 것. 만약 내가 잘 나가는 팀에 있었더라면, 내 업무가 지원 업무가 아닌 퍼포먼스가 눈에 보여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회사란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의 역할도 있어야 하는 건데, 그런 포지셔닝은 늘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차라리 시험처럼 합격점이 나온다면 덜 억울할 텐데, 제자리걸음인 나의 연봉과 직함을 볼 때면 비참한 기분이 든다.
언제쯤 내게도 "니들이 뭔데 날 평가해!"를 외칠 수 있는 순간이 올까. 제시의 그 외침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던 건, 단순히 프로그램에서 느껴지는 불합리함 때문이 아니라 사실 우리도 그 프로그램과 같이 무한 경쟁에 놓여 있으며, 늘 말도 안되는 미션 속에서 서로를 평가하고 평가 받고 있으며, 나를 평가 하는 바로 '당신'을 능력은 물론 인간적으로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닐까.
올해도 성적표를 손에 들고 이번이 제발 마지막이기를 바래보지만, 마지막 성적표는 곧 나의 마지막 월급임을 알기에 그 역시도 서글퍼진다. 그래서 이번 평가도 평가지엔 철판 깔고 ‘나 잘했어요’라고 쓰고, 피드백은 실눈 뜨고 대충 읽어버렸다. 일단 내가 원하는 목표, 내 월급이 단돈 1만원이라도 올라갈 수 있도록 좋은 평가를 받아내기만 하면 되는 거니깐.
그리고 언젠가 <무한도전>에서 정준하 대상 만들기 프로젝트를 하겠다며 이경규를 찾아가 팁을 얻은 적이 있었는데 그의 말은 새겨 들을 만 하다. “1월부터 열심히 하는 건 아무 소용 없어. 시상식 직전인 9, 10, 11월에 집중해야해” 평가 당시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어야 하고, 그 퍼포먼스를 체감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이 잘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 그래서 올해도 지금은 쉬엄쉬엄 하고 있다. 열심히 달릴 9월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