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시작된 이유는 수십 개, 헤어진 이유는 단 하나

와인모임에서 생긴 일

by 위기회

겪은 건지 지어낸 건지 헷갈리는 30대 연애 이야기...


30대가 되니 해가 갈수록 소개팅이 줄고,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로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날 확률은 희소하다. 자만추는 무슨, 오늘도 퇴근길에 자연스럽게 집 근처 만두집에 들러 김치만두를 포장한다. 나에게 자만추는 자연스럽게 만두 추가이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걸 보고 어떻게 참아.


요새 겨울이라 춥다고 안 움직였더니 확실히 몸이 무겁고 군살이 붙었다. 오늘부터 다이어트 하려고 했는데.. 하아 일단 만두 먹고 생각해 봐야지.


만두 먹을 생각에 신나서 집에 가는데 친구한테 카톡이 왔다.

지난번 와인 모임 어땠어?? 후기 고고


며칠 전 처음으로 와인 모임에 다녀왔다. 퇴근하고 피곤한데 어딜 가~ 하는 마음을 꾹 누르고 다녀온 와인 모임이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래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영하의 날씨에도 얼죽코(얼어 죽어도 코트)로 다녀왔다. 뭐 그냥 패딩 입고 갔어도 됐을 거 같지만.


와인 모임 장소에 도착하니 성비는 일부러 맞춘 건지 반반이었다. 겉으론 와인 모임으로 포장했지만 은근히 직장인 단체 소개팅 같은 바이브다.


나는 친구들 따라 와인바에 가서 와인을 몇 번 마셔본 게 전부라 와인에 대해서 잘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품종이 어떻고, 리슬링 계열 와인은 뭐라 뭐라~ 와인에 대해 잘 아는 거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모임 비용을 뽕 뽑겠다는 마음에 (휴 또 이 본전 생각!) 따라 주는 와인을 홀짝홀짝 잘도 마셨다. 누가 맛을 물으면 한껏 고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음 드라이하네요", "달달하네요”, “전 와인은 잘 몰라서~ 라고 말을 흐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이미 느꼈겠지만 내가 와인 모임에 온 이유는 와인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와인 모임에 온 30대 남자들은 어떨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와인이 궁금했으면 챗GPT한테 물어봤겠지. 포털에 검색만 해도 우리나라 파워블로거들이 얼마나 와인을 꼼꼼히 잘 설명해 주는데.


내 느낌에 그날 와인 모임에 온 남자들은 세 가지 부류였다. 허세남, 섬세남, 핑계남. 허세남은 본인의 와인 지식과 와인 취향을 뽐내는데 진심인 거 같다. 다행인 건 와인을 진짜 잘 알긴 해서 허세남이 추천해 준 와인이 다 맛있긴 했다. 고마워요 허세남~ 섬세남은 누가 봐도 I. 섬세한 내향인 같다. MBTI 물어볼걸. 까먹었네. 인상이 선해 보였다. 핑계남은 와인은 핑계고 여자 만나러 온 거 같다. 딱 봐도 인싸재질.


솔직히 말하면 나도 핑계녀다. 자기소개에선 와인에 관심이 생겨 와인을 배우려고 모임에 왔다고 했지만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렇다고 뭐, 와인 모임에서 괜찮은 남자 만나러 왔다고 소개할 순 없잖아.


운영진의 와인 소개를 듣고 준비된 와인과 잘 페어링이 되는 음식을 먹고 마시며 스몰토크를 했다. 자연스럽게 우리 대화는 와인에서, 음식으로, 연애로 흘러갔다. 이 시간만을 기다렸다. 연애 이야기는 왜 이렇게 재밌는지. 크크


다 같이 대화를 나누는데 자꾸 와인 모임에 온 사람 중 A에게 시선이 갔다. 허세남과 핑계남 사이에서 차분하게 대화를 경청하는 모습이 괜찮아 보인다. 은근슬쩍 A의 취미를 물으니 퇴근하고는 주로 운동과 독서를 한다고. 루틴처럼 운동을 하면서 책을 좋아하는 남자라니? 조금 혹하는 기분이 들었다.


술도 들어갔겠다 자리가 무르익자 우리는 다 같이 둘러앉아 이상형, 서로 마지막 연애 (와인모임에서 온 열두 명 모두가 솔로였다. 그럼 그렇지. 커플이 와인모임에 올 리가 없지. 근데 여기 와인 모임 맞아?), 헤어진 이유 등을 털어놓았다. 서로 지난 연애를 이야기하며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침묵...) 평소에 지난 연애를 떠올리지 않는 편이지만, 술을 마셔서 그런지 괜히 내 마음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다른 사람들의 연애 이야기를 듣다가 생각한 게 사랑을 시작하는 이유는 연인마다 모두 다르다. 손가락이 예뻐서(내 친구의 이상형은 손 예쁜 사람), 집 가는 방향이 같아서 함께 집에 가다가 대화가 잘 통해서, 유머코드가 잘 맞아서 등등. 사랑이 시작되는 이유는 수십 가지인데 헤어지는 이유는 하나다. 우리의 미래가 그려지지 않아서.


주변 친구들만 봐도 30대가 되자 서로가 생각하는 미래의 모습이 달라서 헤어지는 경우가 꽤 많다. 그렇게 와인을 홀짝이며 연애와 이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와인 모임에서 뭐라도 생겼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에선 그런 일이 잘 생기지 않는다. 한참 이야기 하다가 중간에 누가 막차 시간 때문에 가봐야겠다고 일어났고, 그럼 다 같이 집에 가자며 급히 자리를 파했다. 30대가 되어도 막차 시간을 지키는 건전한 와인 모임이라니.


그런 뒤엔 뭐 나도 집에 와서 씻고 눕자마자 뻗었다. 전기장판이 뜨끈하니 좋다. 어후 집이 최고야. 와인 모임은 무슨...



다시 만두 포장해서 집에 가는 길.. 와인 모임 어땠냐는 친구의 카톡에 답장을 한다.


"와인 모임 별 거 없었어. 코트 입고 갔는데 얼어 죽는 줄. 근데 한 명 괜찮아 보이는 사람 있긴 해"


친구에게 카톡을 보내고 슬쩍 와인모임 단톡방에서 A 카톡 프로필 사진을 눌러봤다. 내가 먼저 연락해 볼까...? 취미가 운동이고 독서를 좋아하는 남자라.. 외모도 깔끔하고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긴 한데.


아 모르겠다. 만두 다 먹고 생각해야지. 호호 겨울엔 만두와 찐빵이 최고다. 지금은 그저 만두가 식기 전에 빨리 집에 가서 먹고 싶은 마음뿐.




나랑 같이 찐빵 먹을 사람을 찾아서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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