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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보다 현실적인 언니의 조언

운명을 넘어선 한마디

by 위기회

금요일 오후 열두 시, 여의도 오피스텔 1층 스타벅스에서 라떼를 마시며 대기 중이다. 한창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평일 오후에 스타벅스에서 혼자 뭐 하냐고?


1. 업무 미팅을 기다리는 중

2. 휴가 내고 여유롭게 쉬는 중

보통이라면 1, 2의 이유겠지만 오늘은 다른 이유이다.


3. 사주 보려고


어제 호은이의 추천으로 연락했던 철학관에서 갑자기 문자가 왔다.


내일 오후 1시 가능하심 문자 주세요

답장 먼저 주시는 분 예약할 거라 확인 후 답장 주세요


마침 핸드폰을 하고 있어서 문자를 바로 보았고 머리보다 빠르게 손이 움직였다.


가능합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사주를 보게 되었고 지금은 철학관이 있다는 여의도 오피스텔 건물에서 예약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여의도 중심에 있는 오피스텔 건물에서 사주를 봐주신다니! 사주로 돈을 많이 버신 거 같아서 괜히 더 신뢰가 간다. 30분에 10만 원이니, 시급이 20만 원, 하루에 다섯 명만 예약받아도 100만 원이다. 와 부업으로 나도 사주 공부를 해야 하나? 직장인보다 수입이 쏠쏠한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예약시간이 되었다.


문자에 적힌 건물 12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괜히 떨린다. 질문지를 적은 메모를 보면서 질문할 말을 떠올렸다. 그동안 재미 삼아 타로 세 번, 전화 사주 한 번 본 이후로 제대로 사주 보는 건 처음이다. 심호흡을 하고 문 앞에서 노크를 하니 생각보다 별로 안 무서워 보이는 인상의 아주머니가(이후 도사님) 맞아주셨다. 실내는 깔끔한 원룸 오피스텔에 가운데 책상만 하나 덩그러니 있었다.


앉자마자 생년월일을 말씀드리고 2025년도 신년운세를 물어봤다. 앞으로 5년 동안 상승 기운이라 좋을 거라는 비교적 평이한 말을 들었다. 그 말에 자신감을 얻어서 사실 진짜 궁금한 거, 내가 사주를 보러 온 목적인 질문을 꺼냈다.


저... 결혼운이 있나요? 언제 결혼해요?


이 사주는 늦게 결혼해야 좋아. 36~37살에 결혼하겠네. 동갑, 연하는 안되고 배울 점 많은 연상 만나야 해. 토끼띠랑 음력 9월생은 피해. 또, 사업가 말고 공직, 전문직이랑 잘 맞아. 가족들끼리 재미있게 사는지 유심히 살펴보고...


결혼 시기, 결혼 상대의 성격, 연하 안됨(아쉽다..) 등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니 들으면서 귀가 솔깃했다. 도사님은 이미 내 결혼 상대를 알고 있는 거처럼 술술 말씀하셨다. (뭐가 보이시나요?) 이래서 용하다는 건가? 제법 용기가 생겨서 회심의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저 혼자 살아도 잘 살 사주인가요?


평소 눈 낮추면서 누굴 만날 바에야 혼자 재밌게 살아야겠다는 신조가 있어서 이렇게 물어봤는데 '이 사주는 혼자 살 사주 아니야. 결혼할 거야.'라는 답변을 받았다. 과연 내가 결혼할지 의문이었는데 도사님의 확신에 찬 말에 슬쩍 기분이 좋아졌다.


궁금했던 연애와 결혼에 대해 다 물어보고도 시간이 조금 남아서 이외에 이직운과 건강도 물어봤다. 가장 뜬금없었던 건 이직운을 물어보자 금융투자 쪽이 잘 맞는다면서 cpa 공부를 해보라는 말이었다.


cpa요...? 제가요...? 이걸요?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더 궁금한 것들이 있었지만 금방 40분이 지났다. 도사님께 복채를 드리고 나와 여의도역으로 걸어가는데 마음 한편이 홀가분했다. 약간 심리상담 받은 기분?


결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한다'는 답을 들었고, 배울 점 많은 연상을 만난다니. 평소 내 이상형에도 부합한다. 앗 그런데 상대가 키 크고 듬직한 스타일인지 안 물어봤네! 외모도 궁금한데. 그런것도 사주에 나오나? 이제 이 철학관이 용한지는 미래에 알 수 있겠지. 과연 어떠려나?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즐거웠다. 먹구름 같은 지난 연애와 지지부진한 솔로 생활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본 기분이었다.


조바심 갖지 말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내가 할 거 하면서
좋은 인연을 만나야지. 아자아자!



다짐을 하고 마음이 좋아져서 평소에 연애와 결혼 이야기를 많이 하는 단톡방에 바로 카톡을 보냈다.


나 사주 보고 나옴. 36, 37살에 결혼한대.

괜히 안심됨ㅋㅋㅋ 아직 시간 좀 있으니 여유롭게 있을게요~


신나게 사주 썰을 풀고 있는데 보미 언니가 찬물을 뿌렸다.


안돼. 사주 이야기 듣고 여유 부리지 말고

빨리 누구 만나야 해. 노력하라고 위모양.

주변에 소개팅해 달라고는 했어?


보미언니는 나보다 두 살 위라 서른다섯인데, 언니 말로는 한 살 한 살 나이 먹을수록 점점 더 괜찮은 남자들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한다. 대부분 괜찮은 남자는 결혼을 했기 때문에 언니 나이엔 더이상 소개팅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며,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노력해서 소개팅도 받고 모임에도 나가보라고 했다.


아냐 그래도 나 결혼할 운이라니까 인연 있으면 만나겠지.. 라며 작은 목소리를 내었더니,


그래, 그럼 그때 돼서 눈 낮추고 다른 걸 좋게 봐서 결혼할 수도 있지 라는 언니의 말에 갑자기 위기의식이 들었다.


설마 나이 먹으니 이젠 탈모만 아니면 된다면서... 외모도 안보고... 나한테 잘 해주고 착한 남자가 최고라며... 자기합리화 해서 결혼하는 거 아냐?? 그건 너무 싫은데!!!


사주를 보고 와서 안심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고, 보미언니 말에 갑분 현실 파악이 됐다. 40분에 10만 원 내고 본 사주 보다 당장 눈 앞의 현실을 보게 하는 보미언니의 말이 더 설득력 있어 보였다. 아 이럴줄 알았으면 사주 보지말고 10만 원 돈 아낄 걸 그랬네. 보미보살님한테 먼저 물어볼걸. 내가 생각하기에도 사주에서 말한 나이(36~37살, 연상이면 거의 내일모레 마흔임)에 결혼하려면 그때까지 괜찮은 남자가 남아있으려나...? 이건 합리적 추론, 타당한 의심 같은데.


보미언니의 말처럼 이대로 있다가는 서른여섯 살 돼서 "아 그때 사주 다 뻥이야. 사주만 믿고 인연이 오겠지 기다리고 있던 걸 이제와서 후회해. 여유 부리지 말고 누구라도 만날 걸 그랬어" 라고 말할 거 같다. 쎄하다. 나를 움직이는 건 사주도 아니고 보미언니...아니 보미 보살님...


덕선이 남편감 찾기보다 시급한 위모양 남편감 찾기... 본격 시작이다. (근데 뭘 시작해야 하지?)


사주 보고 나와 먹은 붕어빵... 아 10만원이면 붕어빵이 몇개야~~~!


여러분 사주 말고 주변 언니들한테 물어보세요....! 사주에 낼 복채로 맛있는 붕어빵 호떡 호빵 사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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