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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큰 성인도 레테는 떨려

레테: 레벨 테스트의 줄임말

by 위기회

대치동의 유명한 영유(영어 유치원)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레테를 받아야 한다. 레테가 뭐냐고? 레테는 레벨 테스트의 줄임말이다. 7세 이하를 대상으로 한 영어 유치원에서도 레벨 테스트를 보다니! 여기서 놀라기엔 아직 이르다.


어렵게 들어간 영어 유치원에서도 B반에서 A반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유치원에서 주최하는 스피킹 테스트에서 대상을 받아야 한다.(우수상도 안됨, 1등인 대상만 가능) 스피킹 주제도 자유주제는 점수가 가장 낮고, 한국말로 읽어도 어려운 미국 연설문을 말 그대로 연설해야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드라마 〈라이딩 인생〉의 한 장면인데 아마 현실이 더 하면 더 하지 덜 하진 않을 것이다. 스카이캐슬이 방영했을 때도 의대 입시를 전담으로 코칭해 주는 스앵님의 존재에 놀랐는데 그게 벌써 몇 년 전이다.


우리나라 사교육비는 매년 갱신하고 있다. 월평균 사교육비가 국민연금 최대 납부액인 55만 5천 원 보다 많다고 하니 출산율이 저조해져도 사교육비는 증가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이번 글에서 대치동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사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적다 보니 말이 길어졌다.) 어제 퇴근하고 레테를 받고 왔는데 나의 영어실력에 좌절했다.


영어공부 역사를 되짚어 보면 초등학교 3~4학년 때 방과 후 수업으로 원어민 샘에게 영어를 배웠다. 그때 원어민 샘이 Jennifer라는 영어이름을 처음으로 지어줬다. 고학년 땐 학습지로 윤선생을 했는데 녹음이 너무 귀찮아서 숙제가 매번 밀렸다.


중학교 때 국어와 수학에 비해 영어점수가 안 나와서 영어 과외를 받았다. 고등학교 시절 모의고사 영어점수는 2~3 등급이었고 수능을 준비하며 EBS 교재로 영어공부를 했다. (90년대생인 라떼는 수능이 EBS 연계라 EBS 교재로 입시 준비를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1학년 때 교양 필수로 영어 회화 수업을 듣고 그 이후엔 영어와 담을 쌓고 지내다가, 4학년 여름방학 때 취업 준비를 위해 바짝 2개월 동안 토익과 토익스피킹 공부를 했다.


문과생에게 토익점수는 고고익선이라 하여 900점을 목표로 공부했고 5번쯤 시험을 치자 운이 좋게 935점을 받았다. 토익스피킹도 기술적으로 말하기 템플릿을 외워서 레벨 7을 받았다. 생각해 보니 이때 종로 YBM 학원에 다녔으니 사교육의 도움으로 영어 실력과 별개로 필요한 영어점수는 얻어낸 것이다.


그렇게 몇 년 뒤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고 있으며 일 년에 몇 번은 해외 여행을 간다. 아시아 국가로 여행 갈 때는 그럭저럭 영어를 써도 서로 눈치코치로 의사소통이 다 된다. 유명 마사지샵이나 음식점에는 이미 한국말로 적힌 메뉴판이 있어서 영어를 못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베트남 다낭은 경기도 다낭시라고 느껴질 만큼 한국말이 자주 보였다. 영어를 아예 안 써도 여행 가능할 정도.


자꾸 삼천포로 빠지는데 회사에서도 일상에서도 영어 쓸 일이 없지만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갈망은 늘 있다. 죽기 전에 영어를 잘하고 싶다. 살면서 한 번도 영어를 잘한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미국 여행 갔을 때 트레이더조에서 스몰 토크를 하는 직원에게 그저 미소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쉽다. 어렸을 땐 외국으로 출장 다니고, 외국인들과 쏼라쏼라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회사에서 보내준다고 해도 제가요..? 하고 덜덜덜 도망갈 판이다.


요새 일상이 평화로워서 새로운 걸 배워볼까 싶은데 그럴 때마다 늘 영어공부가 고개를 든다.


화상 영어, 전화 영화, 스픽 어플, 유튜브까지.. 손만 뻗으면 온라인으로 영어를 배울 기회가 아주 많지만 자발성이 없는 사람에겐 오래가지 않는다. 그래서 기어코 퇴근하고 영어학원에 가야 영어를 꾸준히 공부할까 싶어서 영어학원 등록을 위해 레테를 보러 갔다.


영어학원에 가는 버스 안에서 Let me introduce myself to you. my name is 블라블라 라고 마음속으로 문장을 떠올리고 갔는데.. (이 템플릿은 무슨 중학교 때부터 쓴 거 같다) 원어민 샘을 보자 머리가 하얘졌다.


원어민 샘은 상담실에 들어오면서 바로 how are you? 라고 물었다. 다행히 I'm fine thank you, and you? 라고 온 국민이 아는 답변은 안 하고 good, how about you? 라고 되물었다.


그 이후에 영어 공부하는 이유는? 회사에서 영어를 쓰냐? 퇴근하고 주로 뭐 하니? 등등.. 알아듣기는 다 알아 들었는데 내 대답은 엉망이었다. 대답하면서도 너무 민망해서 I'm so nervous.. I feel shy.. 갑자기 소심하고 수줍은 사람인 척 얼굴을 붉혔다. 하아 망했다 망했어.


이 정도까지 못하진 않았는데 영어를 입 밖으로 말할 일이 1도 없으니까 진짜 말이 안 나왔다. 레테를 받고 학원을 나오는데 헛웃음이 났다. 아 영어 진짜 너무 못하네..


영어는 정말 어렵게만 느껴지고 재미가 없다. 재미가 없으니 의지로 끌고 가기엔 늘 작심삼일이다. 영어 공부 재밌게 하는 거 어떻게 하는 건데? 진짜 다이어트랑 영어공부가 내 인생에서 의지로 하면 할 수 있는 건데 제일 못하는 거 같다.


영유 A반 애들이 나보다 영어 잘할 듯.. 하아. 영어 잘하는 사람이 제일 부러운 요즘이다.



베이글 주문하며 유창하게 영어 하고 싶다.

좋았던 미국 여행 사진을 꺼내보며.. 말 많고 주접 잘 떠는 난데 영어하는 자아는 수줍은 동양 여자애가 돼..

속상해요. 죽기 전에 영어 잘할 수 있겠지?


100세 인생이니.. 지금부터라도... 해보자 싶지만

영어 노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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