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에 있어 신미양요(辛未洋擾, Western Disturbance in the Shinmi Year)(1861년 6월 1일-7월 3일)는 일부 역사가에 의해 조선과 미군이 직접적으로 전투한 전사(戰史)로 남아 있습니다. 이 사실을 토대로 작성한 미군의 한 병사의 관점으로 작성한 논픽션 습작(習作)입니다
나의 이름은 리암 메이든 (Liam Meaden). 1847년 내가 태어난 해는 신생국가 미국 경제에 있어 가장 활기차고 힘이 넘칠 때였다. 수많은 이민자들이 건국(建國) 한지 100여 년도 안된 미국이라는 나라에 몰려들었다. 우리 부모님도 아일랜드 대기근 때 영국 지주들에게 수탈당하고 보스턴(Boston)으로 넘어와 나를 포함하여 형 그리고 나를 낳고 여기에 터전을 잡으셨다.
미국 북동부 출신이 나는 1773년 동인도 회사에 대항하여 일어난 보스턴 차사건으로 유명한 지역 출신 보니 성격이 무뚝뚝하고 남이 보기에는 좀 가까이 다가서기 어려운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안다. 아메리카 건국 초기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많이 들어와 항상 발음 문제로 놀림을 받으면서 자라왔던 추억이 깃든 곳이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1861년 4월에 북부 공화당(republican)에 기반을 둔 링컨 대통령(Abraham Lincoln, 1809년 2월 12일-1865년 4월 15일, 미국 16대 대통령)의 흑인 노예제 철폐에 반대하여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State of South Carolina)를 위시한 총 7개 주가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Finis Davis, 1861년2월 22일 -1865년 5월 5일 미국남부맹방 초대대통령)
를 임시 대통령으로 새우고 아메리카 남부맹방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결성했다.
출처: 마이크로 빙 AI로 그린 1860년대 초반 미의회에서 노예제로 의견이 갈리는 것을 형상화 하였다.
1861년에 개전한 전쟁은 나의 징집 연령이던 1865년 북군의 승리로 끝나가던 중이었다. 이미 기운 전세였고 가족들은 전쟁이 끝나가는 중에 군대에 징집된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하였으며 나 역시 젊은 시절 경험이라 생각하고 자원입대를 하였다. 난 속으로 전쟁이 끝나는 대로 보스턴부두의 펍의 여급인 엘러너(Elenor)에게 꼭 청혼을 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보스턴으로 곧 돌아갈 것이라는 나의 꿈은 산산이 깨졌다. 그나마 부두 하역부 출신이어서 해군에 입대하였으나 우리 부대는 패망(敗亡)이 짙은 남군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 노스캐롤라이나 피셔요새(Fort fisher) 공격이 첫 전투경험이었다. 아무리 사기(士氣)
가 떨어졌다 하더라도 남군의 저항은 처절했다.
나에게 있어 전쟁의 거대한 참상은 현실로 다가왔다. 하지만 남군의 반격으로 피셔 요새(Fort fisher)의 함락은 불가능해 보였다 링컨대통령의 호소력 있는 전쟁 모병 (募兵) 연설은 나에게 있어 정신 차렸을 때는 링컨 대통령은 설탕발린 듣기 좋은 말뿐이었다.
북군 해군은 화염에 뒤엉켜 전투함은 계속 불타고 있는 상황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죽기 살기로 살아남고자 하였고 나의 첫 참전이자 마지막전투는 북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전쟁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전쟁 초기부터 참전하여 종전할 때까지 살아남은 역전의 노장부터 나와 같은 전쟁에 참전하여 살아남은 신병도 종전은 너무나 기쁜 것이었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링컨 대통령은 승리의 기쁨도 만끽하지 못한 채 그해 4월 중순 암살당하고 말았다. 인생이 기구하다는 것은 이것인가? 언제든지 전쟁터에서 벗어나 보스턴항 술집 마담의 가슴품에 묻히고 싶다는 생각은 나를 새로운 도전으로 이끌게 했다.
전쟁은 북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링컨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남은 자에게 있어 고민과 고통으로 다가왔다. 링컨 암살 후 대통령이 된 앤드루 존슨 대통령(Andrew Johnson, 1808 12월 29일-1875년 7월 31일 미국 제17대 대통령)은 항상 성격이 우유부단한 정치인이었다. 원래 민주당 소속이었고 남부 맹방 지역이었던 테네시주(State of Tennessee) 상원 위원을 지냈던 인물였던 점도 남군 북군 양 진영에서도 항상 어벌쩡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링컨 대통령 당선 후 테네시 주는 곧 북부 연방군 세력하에 들어갔고 링컨 대통령을 위시한 공화당은 당명까지 바꾸어 가며 남부 맹방 세력을 감싸 안으려는 노력을 해왔다. 앤드루 존슨 대통령 역시 노예를 보유한 농장주였으나 남북전쟁 발발 시 남부 측에 서지 않고 링컨의 북부 연방 깃발 아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북부 측에서는 환영을 받았으나 남부 측에서는 반역자와 같은 존재였던 그가 링컨 암살 이후 17대 대통령이 된 것이었다.
1866년 그해는 북군이 승리했지만 북군의 사기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전쟁 후 미국 재건을 위해 모든 국력을 쏟아부은 상태이고 전쟁 후 군인들에게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회적 불안을 동시에 지어진 상황이었다. 전쟁 후 우리 북군 해군의 경우 270여 대의 함선과 2,000여 문 이상의. 대포 그리고 13,000여 명의 해군이 전쟁 후 그대로 잔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고철에 가까운 잔존무기와 인력들은 전쟁후 내각에게 있어 골칫덩어리로 다가왔다
새로운 대통령인 앤드루 존슨은 암살당한 링컨 대통령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한 후 우선 흑인 노예들에게 남북 전쟁 후 북군 전쟁장관인윌리엄 테쿰세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1820년 2월 8일-1891년 2월 14일 , 34대 전쟁장관) 이 남부 지주로부터 이 40만 에이커 상당의 토지를 몰수 후 흑인들에게 각 40 에이커 토지와 노새를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하나 존슨 대통령은 전쟁이 끝난 후 그 약속을 저버리고 그 땅을 전부 다시 남부 지주들에게 넘겨주고 말아 버렸다.
이러한 대통령의 행동은 기존 남부지역의 흑인 노예들은 대단히 정치권에 반감을 갖게 만들었고 북군 연방에 참여했던 18만 명의 흑인들도 전쟁 후 반감이 커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북군 연맹의 승리에도 흑인 참전병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을 미약했고 그리고 아직 북군의 흑인도 아직 봉건적인 노예 수준을 보는 관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남부 맹방에 가담했던 흑인들에게 다른 상황은 아니었다.
미국 정치권력자들에게 있어서 남북전쟁은 노예제 폐지를 통한 민주주의로 한걸음 앞선 형태이고 국제적인 대외 확장의 기회의 명분이지만 패배한 남부 맹방으로서는 그나마 목화 재배 산업과 그리고 그와 관련 목화가 공 사업은 공업과 금융업 중심이었던 북부의 경제력에 잠식당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어떠한 전쟁이듯 마찬가지이지만 전쟁 후 장점 그리고 단점이 극명하게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