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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글레디에이터 2를 보고 짧은 글

원숭이들에게 죽임을 당한 유구르타(Jugurtha)를 중심으로

by 임석빈

https://youtu.be/Ts0N8swyWFI?si=-FI3VjbNx6k3t37N

글레디에이터 2 오피셜 트레일러 참조 유튜브

오래간만에 영화관에 가서 글레디에이터 2를 보았다. 가끔씩 혼자만의 영화감상은 속세의 잡념을 잊게 한다.

영화 오프닝이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하니 설마 설마 했는데 과연 누미디아를 영화의 소스로 사용하다니 극작가의 역사적 감각의 박수를 속으로 보냈다.



로마와 누미디아의 관계는 고대 로마 공화정 및 제정 시기에 걸쳐 복잡하고 변동적인 정치적, 군사적 관계를 보여준다. 대체로 동맹과 갈등이 반복되는 특징이 있었으며, 이는 주로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분쟁 및 지중해 지역 패권 경쟁에 따라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로마와 누미디아의 전쟁은

제2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18-201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 누미디아는 동맹과 분열의 시기를 겪었다.


그 당시 마시니사(Masinissa) 누미디아의 왕으로,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서 전략적으로 동맹을 변경했다. 최종적으로 로마와 협력하여 카르타고를 약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시니사의 기병대는 특히 자마 전투(기원전 202년)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로마군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전쟁 이후 로마는 마시니사를 지지하며 그의 영토 확장을 도왔다. 이는 카르타고를 더욱 고립시키고 약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 멸망 후, 누미디아는 로마와의 동맹 관계를 유지했지만 독립된 왕국으로 남았다.


마니시사 왕 이후로 누미디아 왕들은 로마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로마는 그들의 내정에 개입하기도 했다. 이는 누미디아의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했다.

영화의 초기배경이 되는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Jugurtha)는 로마의 정치 부패를 이용해 왕위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결국 로마와의 갈등이 발생하여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 당시 로마는 다섯 황제의 해의 내란을 수습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후계자들인 카라칼라와 게타 형제가 공동 황제로서 로마 제국을 다스리던 세베루스 왕조 전기인 시절이다.

여기서는 유구르타 즉 누미디아 지도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유구르타(Jugurtha, 기원전 약 160년경 ~ 기원전 104년)는 고대 누미디아 왕국의 왕이자, 로마 공화정과의 갈등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누미디아의 왕위 계승 분쟁에서 로마와 충돌하며 "유구르타 전쟁"의 중심에 섰다.

그의 정치적 책략과 로마의 부패를 활용한 통찰력은 후대 역사가들에게도 중요한 연구 주제로 남아 있었다.

유구르타는 누미디아의 전성기를 이룬 왕 마시니사의 손자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마시니사의 아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용맹하고 야심 찬 성격으로 주목받았으며, 마시니사의 후계자인 미키프사(Micipsa)에 의해 양자로 입적되었다. 미키프사는 유구르타가 로마의 군사 캠프에서 경험을 쌓도록 했으며, 이 과정에서 유구르타는 로마의 정치와 군사 체계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기원전 118년 미키프사가 사망한 후, 유구르타는 누미디아 왕국을 미키프사의 두 친아들(아데르발과 히엠프살)과 분할 통치하게 되었다.

유구르타는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기 위해 히엠프살을 암살하고 아데르발과 전쟁을 벌였다.


기원전 112년, 유구르타는 아데르발을 패배시키고 수도 시르타(Cirta)를 점령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로마 시민이 학살당했다. 이는 로마의 직접 개입을 초래했다.


로마는 유구르타의 행동을 문제 삼아 그를 제재하려 했으나, 유구르타는 로마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제공하여 제재를 회피하려 했다. 그의 유명한 발언인 "로마에서는 모든 것이 팔린다"는 로마의 부패를 신랄히 비판하는 말로 알려져 있다.


결국 로마는 군대를 파견하여 유구르타와 전쟁을 시작했다.

초기 전투에서 유구르타는 게릴라 전술과 로마의 내부 부패를 활용해 로마군을 곤경에 빠뜨렸다. 그러나 로마 장군 마리우스(Gaius Marius)와 그의 부관 술라(Lucius Cornelius Sulla)의 지도 아래 로마군은 점차 우위를 점했다.

기원전 105년, 유구르타는 자신의 장인 보쿠스 1세(모리타니아 왕)의 배신으로 로마에 넘겨졌다.


유구르타는 로마로 끌려가 개선식(로마의 승전 기념식)에서 패배한 왕으로 공개적으로 수모를 겪었다.

그는 기원전 104년에 로마의 감옥인 툴리아눔(Tullianum)에서 굶어 죽었다.

(영화상에서 악티움에서 원숭이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유구르타는 뇌물과 정치적 책략으로 로마의 부패를 드러내며 로마 공화정 내부의 문제를 부각했다. 유구르타 전쟁은 마리우스가 로마 군대를 재조직하고 개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이후 로마 군사의 강화를 가져왔다.


유구르타의 패배 이후 누미디아는 점차 로마의 직접적 영향권에 들어갔다.

유구르타는 능력 있는 지도자이자 전략가였지만, 로마라는 강대국을 상대로 끝내 승리하지 못한 비극적 인물로 기억된다.


유구르타의 죽음 이후 누미디아는 점차 로마 제국의 한 주(province)로 통합되었다.

기원후 1세기에는 누미디아가 로마 제국의 아프리카 속주로 완전히 흡수되어 군사적, 경제적 중심지로 발전했다.


세월이 흘러 누미디아의 기병대는 로마군의 중요한 보조 전력으로 활용되었다.

로마는 누미디아 왕국의 내정에 깊이 관여하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왕을 지원했다.

누미디아는 농업 및 광물 자원, 특히 곡물 공급과 관련하여 로마에 중요한 지역이었다.


결론적으로, 로마와 누미디아는 초기에는 동맹 관계를 유지했으나, 점차 로마가 누미디아를 직접 통치하고 흡수하는 방향으로 관계가 발전했다. 이러한 변화는 로마의 지중해 패권 확장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미 OTT에 풀리기 시작한 했으니 주말을 이용해 감상해 보면 좋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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