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연아범 자작 소설
경기광주의 한여름밤은 쉽게 잠들지 않는다. 도시의 공기는 낮의 열기를 품은 채 축축하게 가라앉고, 새벽이 되면 산기슭에서 내려온 서늘한 기운이 마치 뜨겁게 달궈진 쇠에 찬물을 끼얹듯, 묘하게 긴장된 정적을 깨어놓는다. 그 순간, 무언가가 시작되거나 끝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바람은 조용히 창틈을 파고들고, 어둠 속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서성이고 있다
베란다 너머로 들려오는 윙윙거림은 이번 겨울 새로 설치한 에어컨 실외기의 소리였다. 하지만 그 단조로운 진동 속에 이상하게 섞여 있던 건, 멀리서 퍼져오는 배달앱 라이더의 굉음이었다. 두 소리가 겹칠수록, 나는 점점 내가 깨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순간, 어디선가 들려온 한 차례 떠돌이개의 짖는 소리. 그 순간, 근시때문에 가까운 것이 안보이는 마냥 희뿌연 소녀의 실루엣이 불현듯 떠올랐다. 하얀색 바탕의 붉은 입술만 나에게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 그 소녀는 꿈과 현실 사이 공간에서 무언가를 애기하고 있는 건 확실하다.
그날 밤도 이상했다.
잠은 들었으되, 깊지 않았고, 꿈인지 현실인지 경계는 흐릿했다. 창문 틈으로 스며든 산 냄새는 묘하게 축축했고, 어디선가 버려진 개들의 울음소리가 새벽 공기를 찢고 지나갔다.
그때였다.
희뿌연 잠의 늪에 빠져 있던 나의 눈앞에, 그녀의 입모양은 더욱 더 무언가를 나한테 이야기 하려던 것이었다. 반쯤 감긴 눈꺼풀 너머로 보인 건, 근시 안경을 벗은 느낌처럼 소녀의 얼굴이 확실하게 보였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이었고 황달환자 처럼 얼굴에는 감귤색 진 노랑색이 흰색과 겹쳐서 보였다 흰 블라우스와 푸른 치마는 빛 바랜 사진 속 장면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그 희꺼멉고 누런 얼굴에서 유독 선명하게 도드라지던 건, 선혈 같은 붉은 립스틱이었다. 아니다.. 체리색에 가까운 검붉은 색에 가까왔다.
그 입술이, 천천히,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분명 소리는 없었는데도, 그 말이 내 머릿속 어딘가를 파고들었다.
"민혁아.. 나 왜 안 꺼내줘. 여기 되게 덥고 습해 . 아직 선생님이 뭐라고 해?"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나는 문득, 그 소녀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내가 잊고 있던 오래된 무언가가 다시 내 머리를 내치는 느낌을 들었다.
"민혁아! 민혁아…!”
희미하게 떨리는 음성. 잊혔다고 믿었던 그 이름이 어둠 속에서 파고들었다.나는 숨이 턱 막혔다. 몸은 저절로 뒷걸음질쳤고, 바닥은 이상하게도 젖어 있었다. 차가운 물웅덩이, 익숙한 운동장. 눈앞에 서 있는 그 아이는 분명히…
뿌옇게 보이는 소녀의 얼굴에서는 단지 체리색 입술만 속삭인다.
“민혁아, 왜 그랬어…?”
“ 악 “ 나는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다. 그때 어깨 뒤에서 무언가, 아니 누군가가 나를 붙잡는 느낌에 잠이 깼다.
“일어나! 아빠!!”
쇼파 옆에서 딸아이는 아침부터 유튜브를 보면서 무심히 짜증을 내면서 이야기 한다.
“학교 늦었다구! 또 술 먹었어?”
“아빠가 무슨 술은… 늦잠도 좀 잘 수 있지…”
물기를 머금은 공기 사이로, 잔잔한 두통이 이마 언저리를 때리듯 스며들었다. 꿈속을 헤매다 빠져나온 냉기가 아직도 목덜미에 엉겨 붙어 있는 듯했다. 현실의 온기가, 빌라의 희미한 정적과 함께 밀려들기까지는 몇 분이 더 걸렸다.
“아빠, 정말 학교 늦었어.”
딸아이의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학교. 등교. 시계는 아침 7시 4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몸이 익숙하게 움직인다. 오랜 반복 끝에 배인 습관처럼......
싱크대 위의 싸구려 건조커피 봉지를 뜯는다. 수돗물을 붓고,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와이프는 늘 생수를 쓰라며 잔소리를 하지만, 수돗물 특유의 철분 맛은 오히려 현실로 나를 되돌려주는 신호탄 같았다. 그 쌉싸래한 금속 맛을 한 모금 입에 머금는다.
그리고, 서랍 속 검은 플라스틱 용기에서 흰 알약들을 꺼낸다.
한 줌.
아무 망설임도 없이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손에 남은 작은 알갱이의 약이 희미한 커피향과 뒤섞였다.
그 순간, 문득 떠오른다.
내가 왜 약을 먹고 있는지—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게 더 맞았다.
문틈으로 새어든 빛이 이상하게 희끄무레했다.
마치 꿈과 현실의 경계가,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채 어정쩡하게 열려 있는 것처럼.
어쩌면, 나는 아직 꿈속에 있는지도 몰랐다.
혹은… 그 꿈이 아직 끝나지 않은 현실일지도.
부엌에서 찬물로 얼굴을 적시고도, 어제의 꿈은 잔상처럼 계속 꿈에 남았다.
그날 이후 37년이 지났다. 문득 그 시절이 생각이 스쳐간다.
1988년 8월 여름, 난 성남의 한 초등학교 4학년생이었다. 9월로 다가온 올림픽에 의해 중고등학생들은 개막식 패막식 매스게임에 동원되었고 사촌형집에는 무슨 집에 자랑인양
호돌이 가면과 입으면 쪄죽을 거 같은 호랑이옷이 항상 마루 한구석에 걸려져 있었다.
86아시안 게임, 88올림픽 등 굶직한 스포츠 이벤트등을 통한 보통사람이라고 자처하던 위정자들의 국민통합이 성공으로 이어지자 스포츠 부흥을 위한 수많은 지역 단위 체전이 열렸던 시대였다. 중고등학생들은 88올림픽 매스게임에 동원된 상황이라 도립체육체전 같은 경우 국민학생들이 오전수업만 마치고 오후에는 때약빛 아래에서 연습에 동원되기 일쑤였다.
<계속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