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리틀 인디안 송

by 자낫

세상에 혼자일 때도, 음악은 네 친구야.


번아웃이 올 뻔 했던 시절, 쉬바(Shiva)가 한 말이다. 전쟁 속에서도 꽃은 피고 살아있는 것들은 사랑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음악이 흐른다.


12년 전 영등포의 한 프로젝트 사무실에서 쉬바의 팀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이커머스’ 플랫폼이 사람들의 일상을 크게 뒤바꾸어 놓고 있던 시기였다. G 마켓, 인터파크, 티몬, 위메프, 11번가 등이 춘추전국 시대를 이루던 시기였고, 국내 한 대기업의 이커머스 플랫폼 개발 프로젝트에 인도 IT 회사 소속 통역사로 탑승했다. 저렴한 인건비에 수준 높은 기술력을 앞세우며 인도 개발자가 한국에 물밀듯 들어왔다. 매일 리틀 인디아로 출근해 그들의 말과 글을 옮겼다. 열 명 남짓의 인도인 동료들은 모두 억양과 말투가 달랐고 떠들썩했다. 칼틱은 입만 열면 ‘ok’를 남발해 ‘오케이 칼틱’으로 불렸고 느긋하고 농담을 잘하던 무슬림 친구 아자드는 ‘바바(인도 어느 지역 말로 어르신)’로 통했다. 헤이, 바바, 이거는 이렇게 해야지 바바. 정신차려, 바바. 이거는, 오케이? 이렇고, 오케이? 저거는, 오케이? 저렇고, 오케이? 알았지, 오케이? 말하기 좋아하는 인도인들의 제각각 억양이 섞여 이리 흐르고 저리 흘러 사무실은 도떼기 시장같았다.


프로젝트는 좌충우돌 우당탕탕 해가며 고객사와의 갈등이 커지고, 산출물은 예정대로 예상대로 안나오고, 리틀 인디아 크루들은 하루하루 목숨을 겨우 연명해 가고 있었다. 밤을 새는 날이 허다했는데 해가 지면 사무실 긴장은 한결 누그러지고 누군가 슬며시 음악을 틀면 여기 저기서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을 구르거나 손바닥으로 장단을 맞추기도 했다. 인간의 수명은 음악으로도 늘어나는 것 같기도 했다.


리틀 인디아의 선장이었던 쉬바는 뭄바이 출신으로 절대음감 소유자였다. 그는 세상을 소리로 인식하고 흡수했는데, 서울의 지하철 안내 방송 앞뒤로 나오는 가야금 곡조를 휘파람으로 부르곤 했다. 젊은 시절 직업 기타리스트로 뭄바이의 극장 무대에 서기도 했다. 긴 손가락 끝으로 기타 줄을 쓰다듬을 때 세상에는 온통 그만 존재하는 듯했다. 고객의 앵앵대는 소리도 상사의 땡땡대는 위협도 멀어지고 그는 우리를 다른 시공간으로 끌고갔다. 쉬바 신이 강림하고 아둥바둥 하는 인간들을 구원했다. 큰 키에 체격이 좋았던 그가 노래를 부르면 파동이 가슴 깊숙히 전해졌다. 고음을 부를 땐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였고 저음을 부를 땐 눈을 지긋이 감았다. 좋은 노래를 들으면 함박 웃음을 띠며 R 발음을 최대한 있는 힘껏 굴리며 Rrrrrrrapchik라고 했다. 뭄바이 음악계의 은어로 ‘끝내준다’는 뜻이다.


비나이라는 친구는 일곱 살 딸과 아내와 함께 아예 한국에 거처를 옮겨 생활하고 있었다. 어느 날 팀원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했고 양평동 한 아파트에서 인도 축제가 펼쳐졌다. 따뜻한 인도 가정식이 차려졌고 꼬마 아이는 신이 나서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니고 당연히 음악이 빠질 수가 없었다. 이것저것 듣다가 꽂혀서 반복해서 들으며 목청껏 합창했던 노래가 바로 Why this Kolaveri di 이다. 인도 남부 타밀 지방의 노래다. 유머러스하고 흥겨운 가운데 듣기에 따라서는 애환이 느껴진다. Kolaveri는 살인적인 분노(murderous rage)를 뜻하는 타밀어이다. 노래 초반에 This is a soup song 이라는 나레이션이 나오는데 soup song 실연에 대한 노래다. '죽일놈의 사랑' 정도 되겠다. 한창 흥이 오르고 그 많은 수다쟁이 인도인들 사이에서 늘 말이 없던 곱슬머리 키 작은 수다카가 자신의 속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한 때 사업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고 한다. 언젠가 다시 자기 사업을 하겠노라 다짐했다. 수줍은 사람이 마음 속 깊이 품은 자신의 꿈과 상처를 이야기하자 가슴이 뭉클했다. Kolaveri의 힘이었다. 마법의 노래를 여러분에게도 소개한다.


Why this Kolaveri Di


좋으면 외쳐보자, 으르르르르-압치크(Rrrrrrapchik)!


후일담: 불안의 대서사시였던 이 프로젝트는 간난신고의 심폐 소생술로 약 2년 반을 이어가다가 완전히 멈췄고 팀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현재 나는 그와 비슷한 프로젝트에 다시 몸담게 되었다. 그 사이 중간에 갭 이어를 갖고 세계 여행을 하며 벨기에에서 오케이 칼틱과 그의 가족을 만났고, 벵가로르에서는 쉬바네 집에서 하루 묵었다. 모두 얼굴이 한결 밝아보였다. 그 이상 일에 미친 시절은 모두에게 더 안 돌아오길, 대신 모두의 인생에 항상 음악이 함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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