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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애에 대응하는 자세

세련된 비즈니스 관계에 대한 갈증

by nay


1.

싱가포르에 와서 오픈 이노베이션 매니저 역할을 처음 시작할 때는 모든 것이 즐거웠다. 대부분의 경우 영어로 대화하는 것이 부담 되었지만 신나서 만났다. 빨리 좋은 기회를 찾아서 본사에 소개시켜 주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본사에 보고할 꺼리도 넘쳐나니 나의 존재감도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다. 한 편으로 상대방도 우리 회사와 미팅을 했다거나 네트워킹을 만들었다는 보고가 가능하니 상부상조인 셈이다.

다수의 만남은 1회성에 그치거나 더 이상 follow-up 하지 않는 기억이 되어버렸다. 기회를 엿보다가도 흐지부지 되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만남의 역학 관계 상 대개 우리 회사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투자'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냥 관심이 있어서 가볍게 보고 싶은 내 입장에서 (때로는 캐쥬얼하게 만나고 싶은 경우가 있다) 선뜻 선의의 만남을 요청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만남은 부담이 되었다. 직접 연락을 하기도 하지만 종종 싱가포르 정부 산하 기관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니 미팅 주선을 할 때도 마음이 편하진 않다.

이런 일이 반복 되다가 한 번은 의도치 않게 상대방에게 한 소리 들은 적이 있다. 투자비를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기회를 찾다가 싱가포르 국립연구 기관 아래에 있는 한 부서에서 펀드(연구비 보조)를 운영한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주로 어떤 종류의 과제들에 투자를 도와주는지, 우리도 활용할 기회가 있는지 궁금해서 만남을 요청했다. 처음엔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상대 담당자가 어느 순간 갑자기 우리에게 이런 말을 쏟아 부었다.


'너네 회사는 맨날 뭐 한다고 하면서 정작 아무 것도 안하지 않았냐' (그러면서 왜 만나자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와서 같이 갔던 팀장과 당황했던 기억이 뚜렷하다. 지금은 좀 담담하게 적었지만 그 때의 당혹감과 이후 느낀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무 것도 안 하다니 그건 Fact가 아니다. 적어도 다른 방면으로 투자가 매년 있었다. 단지 미팅에서 만난 담당과 직접적인 인연이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렇다 할 반박을 못한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1회성 찔러보기 만남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를 만나기 전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우리 회사가 그동안 뭘 했는지 체크를 하고 나왔을 게다. 기대한 만큼의 큰 규모 투자를 안 했다고 아무 것도 안한 것으로 매도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만, 사실만으로 따지면 우리가 몸을 사린 건 맞으니까. 어쩌면 작정하고 그 말은 하려고 미팅에 나왔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2.

링크드인을 통해 들어오는 인연은 위와 달리 '상대가 원해서'인 경우가 많다. 현재 역할 때문일 수도 있고 싱가포르에 있다는 것을 명시해서 일 수도 있는데 자주 연락을 받는다. 누가 처음에 미팅을 요청하든 이제는 내가 조심스럽다. 아무 것도 개런티하지 못하는데 무조건 한 번 보자, 한 마디 던지기가 싫은거다.


미팅 이후에 지지부진한 모습이 싫다.

때로는 우리 회사의 입장이 정해지지 않아서,

때로는 내부 개발 이슈와 겹치기 때문에,

정말 때로는 특별한 검토 필요성이 떨어지는 것들 때문에,

'거절'의 입장이 되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괜찮은 업체를 본사에 소개했다. 보통의 경우 Introduction 메일을 상대방과 회사 내부 사람 모두 수신인으로 묶어서 보내게 된다. 양쪽에 각자 어떤 일을 하는지 간단히 쓰고 앞으로 둘이 잘 얘기해 보라고 하는 걸로 소개자의 몫은 끝난다. 상대 회사는 바로 회신으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연결시켜 준 우리 회사 사람에게 언제 미팅할 수 있는지 답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답이 없다. 바빠서 그랬겠지라고 이해했지만 며칠 간 아무 액션이 없었다. 결국 상대방이 개인적으로 문의를 해왔다. 혹시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이다. 이럴 때 힘이 쭉 빠지고 가끔 등에 땀이 흐른다. 적어도 상대에게 적당한 피드백을 적절한 시기에 해주는 것이 맞다.

또 한 번은 이런 적도 있다. 링크드인을 통해서 나와 개인적으로 연결되었지만 공식적인 회사 펀딩 과제에도 지원한 경우였다. 이미 내부적으로 개발 중인 업무와 너무 겹친다는 이유로 검토를 중단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면 나한테 문의가 왔다. 적어도 탈락 했으면 공식적으로 탈락의 이유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원해 줘서 고맙다'는 얘기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았을까 (나중에 확인해 보니 메일로 연락은 전해졌다고 한다. 중간에 오해가 있었나 싶다).

이 밖에도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할많하않'.



회사 대 회사의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개개인은 회사의 고객이 될 수 있다. 그들은 개인의 관점에서든 회사의 입장에서든 회사의 평판을 만들어 준다. 외부인들을 많이 만날수록 마음의 짐이 덜어지기 보다는 오히려 고민이 쌓인다. 비즈니스를 위한 적절한 예절이란 무엇일까? 제안을 거절해야 하는 순간에 서로 기분 상하지 않게,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기술'에 대한 목마름이 생겼다.

이메일을 정중하게 쓰면 된다라는 것이 아니다. 회사의 입장을 명확히 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대답하거나 시간을 끌며 적당히 지나가도록 방치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고객(회사)과 연결되었을 때 취해야 할 기본적인 행동들과 피드백의 수준, 관계를 맺고 끊는 공식적인 절차나 프로세스, 판단의 기준, 왜 그렇게 했는가에 대한 명확한 기록... 이런 것들이 내부적으로 체계화 될 필요성이 있다. 개인의 능력에 맡기고 '너가 잘 알아서 해결해'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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