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빨래를 갠다.
오전에 이케아에 갈 때쯤 비가 많이 내렸다. 외출을 해야 하는데 빨래가 끝나서 일단 베란다에 있는 건조대에 널어 두었다. 집에 돌아와 어찌 되었나 만져보니 역시나 하나도 마르지 않았다. 건조기에 넣어 돌려두고 잠시 달게 낮잠을 취했다. 자고 일어나 소파 뒤를 쳐다보니 아직 개지 않은 마른 옷과 수건, 양말 따위가 거실에 늘어져 있다. 아내가 건조기에서 꺼낸 모양이다. 가만히 일어나 아내에게 웃음을 지은 뒤 바닥에 앉아 빨래를 개기 시작하였다.
착착 각을 잡아 갠 후 옷장에 차곡차곡 쌓거나 제자리를 찾아갈 때 무언의 희열을 느낀다.
결혼 전에는 당연히 혼자 할 일이었고 아내와 같이 살게 되면서 빨래는 늘 나의 몫이었다. 한국에서는 며칠에 한 번 빨래를 하고 정리하지만 싱가포르에선 땀에 젖은 빨랫감이 늘 있다. 거의 매일 아침 세탁기를 돌리고 매일 저녁 빨래를 갠다.
아내는 내가 개어 준 옷을 꺼내 입을 때면 엄마와 함께 사는 것 같다고 했다. 어떻게 그리 착착 잘 접는지 신기하단다. 혹자는 남편인 내게 계속 그 일을 시키려고 그러는 것이리라 의심할지 모른다. 허나 누구나 잘 하는 것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나는 요리를 잘 못한다. 빨래는 아니지만 그녀가 대충 구겨서 접어 두는 우산도 다시 펴서 곱게 접어 가방에 넣어 둔다. 조금 귀찮은 일이지만 그녀가 꺼낼 때마다 손에 착 잡히는 느낌이 좋다고 한다. 몇 번이고 내게 그 말을 하였다. 하여 나는 군말 없이 역시 몇 번이든 아니 평생을 접어줄 의향이 있다.
어떤 옷은 2단으로, 수건은 3단으로, 팬티는 팬티를 접는 패턴으로.. 각각 옷마다 접는 방법도 다르고 개어서 옷장에 넣는 방식도 다르다. 가끔 유튜브나 핀터레스트에서 옷 접는 법을 찾아 보기도 하였다. 정리의 여왕이라는 곤도 마리에의 방법도 참고했다. 옷장 안에 가장 예쁘고 아름답게 보관해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옷걸이를 쓰지 않고 서랍 안에 넣어 두는 경우, 다시 꺼내 입을 때 어떻게 하면 구김이 덜하게 접어둘까 고민한 적이 있다.
빨래를 개는 방법과 갠 후 옷장을 다시 채울 때 정리의 이유와 방식이 있듯이, 빨래를 건조대에 널 때도 나름의 기준이 있다. 카테고리를 좋아하는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 널지 않는다. 양말은 양말이 널리는 칸이 있다. 수건은 건조대의 맨 앞쪽, 나에게서 먼 곳에 우선 넌다. 두꺼운 옷이나 고무줄이 들어가 잘 마르지 않는 부분이 있는 옷은 옷걸이를 이용하거나 두툼한 곳이 바깥으로 잘 드러나게 널어 둔다. 아이의 옷은 왼쪽에, 어른의 옷은 오른쪽에.. 이런 식이다. 너무 경악할 필요는 없다. 아이 옷이 언제나 건조대의 왼편이어야 할 당위성은 없기 때문이다. 먼저 어떤 것부터 널리는지에 따라 그 날의 경향이 정해지는 것이다. 그 정도의 강박은 없다. 하지만 아내가 옷을 널어둘 때면 나와 확연히 달라서 개기 위해서 걷을 때 기분이 상쾌하지 않다. 이렇게 적고 보니 참 이상한 성격이다.
싱가포르로 오면서 집에 설치된 건조기를 돌릴 때가 있다. 워낙 습한 날씨 덕분에 건조기 없이 보송한 빨래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건조기에서 막 꺼내 따뜻한 옷들을 손에 쥐고 잠시 냄새를 맡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따스한 온기와 갓 끝난 빨래의 좋은 냄새가 아직 남아있는 까닭이다. 건조기의 소음을 견뎌낼 만한 가치가 있다. 아내는 건조기로 말린 수건을 좋아하지 않는다. 건조대에 자연 건조로 말라서 약간 빠득하고 딱딱한 느낌의 수건을 쓸 때가 좋단다. 건조기로 말린 보송한 수건이든, 건조대에서 걷어 온 빠득한 수건이든 개는 방법은 늘 같다. 길게 반으로 한 번, 다시 같은 방향으로 반 접고, 옆으로 삼분의 일 씩 걷어서 쌓아 올리면 끝.
난 반대로 빨래 하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이상한 습성이다.
빨래를 개는 행위에는 별다른 고민의 시간이 없다. 상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늘 하듯이 반복할 뿐이다. 빨래를 개는 행위에 거창한 의미나 철학을 부여하고 싶지도 않다. 묵은 때를 벗고 다시 입혀질 옷들을 예쁜 모양으로 접어서 어느 서랍, 어느 옷장 안에 고이 넣어둘 때, 그래서 언젠가 적당한 때에 꺼내어 입게 될 그들을 가지런히 넣어 두는 행위는 일상의 노동이자 작은 기쁨 임을 고백하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