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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그 단어의 감정

by nay

영화 <집으로>가 나왔을 때, 다들 할머니의 따뜻함을 떠올렸을 것이다. 요즘은 세련된 할머니들이 너무나 많지만, 할머니의 스테레오 타입은 시골에 살고, 주름은 쭈글쭈글 깊이 파여 있으며, 허리는 굽었고, 몸빼 바지 입고 조금 배움이 짧은, 그러나 자식과 손자를 위해서는 한없이 퍼주기만 하는 그런 이상적인 모습이 사람들의 상상 속에, 어쩌면 기대 속에 있다.


내 할머니는 가족 불화의 온상이었다. 어릴 적 기억 속에 할머니와 어머니는 항상 서로에 대한 증오가 가득했다. 외아들 집에 남편 하나만 바라보고 시집 온 어머니는 고된 시집살이를 하셨다. 이건 그녀의 단독 증언이나 기억이 아니라, 시어머니인 할머니가 애초에 공공연하게 그런 발언을 하였기에, 그리고 가족들이 동의할 것이기에 편견은 아니다. 시어머니는 의심 많고 자기 고집 센 사람이었다. 그나마 어머니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이 항상 당신 편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하는 쪽은 시어머니였지만 내 기억 속에 그녀는 절대 외로워 보이지도, 약해 보이지도 않았다.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다. 어린 나이에 혼자 아들 키워 내느라 더 독하게 변하신 것일지도 모르겠다만, 아버지의 증언에 의하면 할머니도 만만치는 않은 분이 분명했다.
나는 많이 어렸었고 두 어른(때로는 세 어른)의 싸움판에 내가 끼어들 여지도, 관심도 없었기에 아주 정확한 기억은 많지 않다. 주된 싸움의 이유는 마음대로 무언가를 처리한다던가, 물건이 사라지면 어머니를 의심한다던가, 어디 가서 흉을 본다던가 하는 등의 것이었다. 할머니는 혼잣말을 자주 하셨고 그것이 듣기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주된 기억은 사건의 기승전결이 아니라 화를 내고 목소리를 높이며 싸우던 부모님의 모습이다. 아버지가 쓰레기통을 방바닥에 집어던진 일이 있는데, 내가 몇 살이었는지, 왜 그랬는지 이유는 전혀 모른다. 그 장면만 마치 짧은 클립처럼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마치 조금 전 보았던 모습처럼 재생될 뿐이다 (평소 조용하지만 욱하는 성격은 어쩌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일지도. 이렇게만 써 놓으면 아버지가 불효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당신의 어머니를 가장 곁에서 오랫동안 보필하신 효자다).


나는 어머니의 편이었고, 할머니의 편에 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러고 보면 왜 손자인 내 입장에서 그를 싫어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할머니가 주로 나에게 시키는 것은 방에 들어와서 불편한 당신의 등을 꾹꾹 밟아달라는 요청이었다. 그게 별로 내키지 않았다. 별것 아닌 일이었는데 말이다. 이미 할머니는 집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해서였는지, 아니면 그냥 할머니 방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도 싫고 그녀의 부탁이 귀찮아서 그랬는지 선후 관계도 불분명하다.
한 번은 할머니가 나에게 연필 깎기를 사다 주신 적이 있다. 그 당시에 누구가 하나쯤 갖고 있던 샤파였는데 나에겐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감사하고 즐거울 일인데, 할머니의 선물이라는 상황 때문이었는지 그리 즐겁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나에게도 샤파가 생겨서 기뻤지만, 선물의 당사자가 할머니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그 기분이었음이 다시 떠올랐다.
할머니의 덕을 좀 본 것은 방방 놀이터를 잠깐 운영하셨을 때다. 역시 왜 그런 일을 벌이셨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시 다니고 있던 국민학교(난 국민학교 출신) 바로 앞에 방방 기계를 한 3-4대쯤 가져다 놓고 장사를 하셨다. 나야 그 집 손자이니 공짜로 무한정 탈 수 있어서 마냥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어린 시절 파편처럼 남아있던 별로 좋지 않은 기억들은 할머니라는 존재감, 이미지에 대해 나만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 냈다. <집으로>를 보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할머니를 떠올리며 감동과 재미를 찾았다는데, 보는 내내 답답하고 그저 그랬던 것은 아마 나 혼자였을 뿐이리라.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할머니를 떠올리게 되었고, 그런 생각은 여러 안 좋았던 기억들로 연결되었다. 나에겐 착하고 정겨운 할머니의 기억이 없음에 살짝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랬던 할머니는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노인이 되신 후에는 전투력이 많이 떨어져 어머니나 아버지와의 다툼은 거의 없었지만 (전해 들은) 몇 번의 기행이 있었다. 형의 증언에 의하면 한 번은 집에 갔는데 역한 냄새가 나서 들어가 보니, 할머니가 유황성분이 들어간 무엇으로 온몸을 칠하고 계셨다고 한다. 피부가 가려운데 어디서 듣고 오셨는지 자가치료(?)를 하신 것이다. 열렬한 불교 신자였다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는 고집을 부려 천주교 세례를 받으시는 등, 이런저런 이야깃거리를 많이 남겨주기도 하셨다. 다행히 치매는 없었으나 암튼 독특한 행동으로 주변을 좀 힘들게 하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집 안에서 넘어져 뼈가 부러져서 입원을 하셨다. 결국 이 사건은 노인의 건강을 급속하게 악화시켰다. 그 전에는 밥 한 그릇 뚝딱 잘 드시던 분이었으나 끝내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할머니를 떠나보내면서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100세 넘게 사셨기에 늘 마음 한 구석에 언젠가 돌아가실 날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었으리라.
그런 할머니를 보낼 때 가장 많은 눈물을 보인 건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염을 하러 들어갔을 때, 시신을 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냐는 말에 아버지는 ‘어머니, 이제 편하게 가세요’라고 하셨다. 그때 어머니는 왈칵 눈물을 흘리셨다. 당신을 50년이나 넘게 시집살이시켜 온 그분을 떠나보내며 어쩌면 가장 힘들어했고 미워했을 사람인데. 아들이나 손자 손녀 모두 덤덤하였기에 더욱 의외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눈물은 화장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그것이 회한의 눈물이었는지, 지난 긴 시간 쌓였던 감정의 북받침인지, 허망하게 사라짐에 대한 안쓰러움인지, 자신도 모르는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였는지 확인하지 않았으나 그저 어머니의 울음에 동감할 수 있었다.



여전히 할머니, 라는 단어에는 복잡 미묘한 기분이 섞여있다. 어렸을 때 할머니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 자란 지금도 할머니라는 말은 무채색에 가깝게 느껴진다. <나 혼자 산다>라는 프로그램에서 박나래가 할머니 댁에 가면 어린애처럼 살갑게 굴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무한한 사랑의 눈빛과 정성스러운 대접이 여전히 낯설다. 평생 나는 그런 기억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여담인데 아이를 키우면서 깨달은 건데 부모의 행동과 말에 아이는 거의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보다는 누군가의 행위와 판단을 근거로 자기 생각을 정립해 나간다. 이제 와서 부모님에게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분들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자식 앞에서 굳이 보기 안 좋은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할 분들이 아니시고. 유독 엄마 아빠가 조금이라도 언성이 높아지면 불안함을 보이는 지금의 내 아들에게 혹시 어렸을 때 나의 즐겁지 않은 기억이 전염된 것은 아닌가 반성도 한다.


할머니 기일도 아니고 특별히 할머니를 떠올릴 일도 없는데 불현듯 그분이 생각났다. 그분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은 없지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가족으로서 함께 살았던 그 기억과 감정을 언젠가 한 번은 정리하고 싶었다. 그게 지금인 듯하여 고백하듯 참으로 건조하게 이야기를 남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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