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y Feb 27. 2021

답정너를 싫어합니다.

답정너라는 말이 있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해'라는 말을 줄여서 부른다. 답이 정해져 있어서 좋은 점은 내가 고민하고 신경 쓸 이유, 시간, 노력이 필요 없다는 데 있다. 답이 정해져서 나쁜 점은 내 의지나 생각이 반영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바꿀 필요와 노력이 전혀 반영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상황에 맞게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것이 답정너다. 생각하기 싫을 때 답정너는 무척 좋은 핑곗거리가 된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둘 다 준비해 봤어, 라는 건 정말 배려심이 많이 반영된 표현이다.


회사 일을 하다 보면 답정너인 경우가 있다 (많다). 윗사람은 명령을 내리고 구성원은 그것을 실현하는 활동을 한다. 안 그래도 이것저것 신경 쓸 일 많으니 '이렇게 저렇게 해'라고 명확한 방향성을 잡아주면 편한 점이 분명히 있다. 강력한 리더의 명령과 조직 체계를 통해 구성원이 한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간다. 답정너의 장점이다. 다만 반대의 의견이 있더라도 다수의 구성원이 동감할 수 있는, 그런 답이어야 한다.


잘 들여다보면 답정너가 아님에도 일부러 답정너로 전달되는 경우가 있다.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높으신 분이 이렇게 하라고 해서.. 조직의 장이 내린 오더니까.. 팀장이 결정한 사항이니까..

왜 그런지를 물어도 <나는 모르겠소>로 일관하거나 어쨌든 너는 그것을 구현해 내라고 설득하고 종용하고 때로는 읍소하는 경우도 있다. 이유불문. 너의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니 일단 정해진 기간까지 결과물을 내놓으라 한다. 이유도 모른 채 하는 일이란 답답하기 그지없다. 조직의 부속품 같은 회사원의 모습. 답정너의 단점이다.




연구의 시작은 가설이다. 가설이란 '현실적 조건에서는 증명하거나 검증하기 어려운 사물, 현상의 원인 또는 합법칙성에 관하여 예측하는 이론'이라고 위키백과에 풀이되어 있다. 쉽게 풀이하면 '혹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순수한 질문이다. 연구자는 자신이 던진 질문이 맞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실험으로 증명해 낸다. 이것도 답정너의 하나이긴 하지만 연구자의 고민 속에서 스스로 던진 답이다.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질문의 시작, 주체가 자기 자신이란 점이다. 이제 답이 정해졌으니 거기에 맞는 논리를 만들고 검증 실험을 설계해 본다. 즐거운 경험이다.


답정너라는 말이 대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이유는 남이 이미 답을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답정너 상황은 보통 연구자의 가설보다 다른 부서의 가설(=답)이 전달되면서 발생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다른 부서는 과학적 전문성보다는 시장의 트렌드, 타사 제품과의 비교 우위, 우리 브랜드의 차별적 가치 등 모호한 목표를 답으로 갖기에, 전달된 가설 역시 과학적인 논리와 근거에 기반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회사의 연구는 얻어야 할 답의 가능성을 무척 좁게 만든 채 과학적인 방법과 접근의 힘을 빌어 구현해 내는 것이기도 하다. 온전하게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는 것이라고만 볼 수 없다.


그나마 정해진 답이 생각대로 나와주면 고마운 일이다.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으면 답답하고 곤란하다. 너의 생각이 틀렸어, 네가 던져준 답은 증명하기 어려워, 그런 말을 아무렇게나 던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고민 끝에 만든 답이라서 그렇다. 그 답이 비즈니스를 위해 쓰일 하나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답정너가 싫은 이유는 잘못된 답을 들고 왔기 때문이 아니다. 가설은 틀릴 수 있다.

정해진 답을 얻지 못했을 때 마치 내가 잘못한 것 같은 자책을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 첫 번째 이유다. 어쨌든 의뢰자가 원한 답을 주지 못하기에 그렇다. 혹시 내가 실험 설계를 잘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더 나은 검증 방법과 시스템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한다. 또한 가설을 제대로 검증해 내지 못하는 능력 부족으로 비치는 것이 싫다.


답을 제대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보다 그저 관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원래 있던 것에서 조금 뭘 더하거나 빼고, 다른 것을 살짝 얹어서 새로운 기술인양, 획기적인 제품인양 이야기하고 싶어 하면 안 된다. 새 기술이 더해진 멋진 제품처럼 보여달라고 받은 그 '답'은 연구자적 관점에서 하나도 새롭거나 멋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것을 증명해 보이려니 힘든 것이다.


애초에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을 들고 오는 경우가 그 마지막 이유다. 정말 답정너의 나쁜 표본이다. 현실적인 이유로 결정되어 버린 어떤 결과물이 있다. 자세히 뜯어보니 이건 정말 '답이 없다'. 그런데 답이 필요하다고 한다. 실험으로 증명해 달라니 참으로 곤란하다. 흔히들 현실화하기 어려운 제품을 보면서 공돌이를 갈아 넣어서, 외계인을 고문해서 나온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를 하는데, 갈아 넣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연구자의 관점에서 가장 바람직하게는 열린 답과 가능성을 바란다.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답에 대해 자신 있게 얘기하기 어렵다. 어떤 소재가 원하는 효능이 나올지, 나오지 않을지 실험을 통해 검증하는 과정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답이 아예 나오지 않거나 잘못된 가설일 가능성이 있다.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았을 때 과감히 포기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비즈니스에서 답정너는 피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진짜 필요한 답이 그것인지, 관성적으로 접근한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제발 누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들고 왔다는 핑계는 참 군색하니 그런 대답은 하지 말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