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y Jul 24. 2021

연구했던 썰 푼다.

3년의 연구 끝에 비록 실패했지만.

책을 낸 이후 가끔 해보는 행동 중 하나는 책 제목으로 검색해 보기다 (연예인들이 녹색창에 자기 이름 검색한다는 것이 이해가 된다! 혹시 이거 나만 해보는 행동인 거?). 아쉽게도 리뷰나 후기가 많지 않은 편이라 누군가 조금이라도 뭘 써준 것이 있으면 그저 반갑고 감사하다. 그중에 어떤 분이 자신도 연구직에 있는 사람인데 '정작 연구했던 이야기는 많지 않고 중간 관리자의 고민 중심이라 기대했던 부분이 없더라'는 내용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 우선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점, 즉 고민이 가득하여 무엇이든 쏟아내고 싶고 그래야만 했던 시기는 연구개발보다 중간 관리자로서 본격적인 역할이 커지던 때였다. 나름 열심히 연구 그 자체에서 성과와 인정을 받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이런 글을 쓰지도 않고 기록해 둔 초고 조차 없다. 다른 하나는 어쨌든 현직에 있다 보니 글 욕심에 실수로 회사의 내부 사정을 유출하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어, 가급적 회사원이라면 공감할 내용 위주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공유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겠지만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지 공개적으로 쓰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그러다 보니 뭔가 드라마틱한 연구개발의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쉬운 면이 있음에 공감한다. 


그래도 대체 화장품 회사는 어떻게 연구개발을 할까 궁금한 독자가 몇 분 계실지 모르겠다. 오래전에 했던 일을 슬쩍 끄집어 내보기로 한다. 어림잡아 15, 16년 전의 일이고 종료 과제이긴 해도 역시 구체적인 내용을 쓰지는 않겠다. 그저 화장품 개발을 위해 연구를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감을 잡을 수 있는 소개 정도는 가능하지 싶다. 요즘의 연구 문화와 방법은 훨씬 더 발전했기 때문에 입사 당시 참여했던 프로젝트의 예시는 상당히 out-of-date 임을 참고하고 봐주시면 좋겠다.


3040 여성들이 많이 갖는 어떤 피부 고민을 해결하는 목표의 과제였다. 당시 연구 분위기는 신약 개발 과정과 유사하게 진행된 면이 있다. 초기 임상 연구 결과, 피부를 구성하는 다양한 세포들 중에서 한 종류의 세포에 있는 A라는 단백질의 발현(expression)이 높으면 피부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A 단백질의 활성이나 발현을 낮추는 소재를 찾아 제품으로 개발하는 일이 필요했다. 

A 단백질을 이제 '타겟'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임상 결과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니 타겟의 조절이 정말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추가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추가적인 기능 연구를 통해 가설의 의미가 있는지 확인하고, 다른 사람들의 연구 사례를 통해 우리가 찾은 타겟이 정말 중요하다는 확신을 얻었다. 

타겟을 찾았으니 이를 조절할 수 있는 소재를 확보하기 위해 모 연구기관에서 다양한 물질들을 잔뜩 받았다. 이것을 보통 라이브러리라고 부른다. 도서관에 가면 다양한 책이 가득 있는 것처럼 물질 라이브러리에는 가능성을 가진 미지의 물질이 가득하다. 물질이 워낙 많았다. 1만 개 이상의 방대한 라이브러리였기 때문이다. 건초 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심정으로 검토하는 단계를 거친다. 필자가 투입된 시점은 이 앞까지의 과정이 모두 완료되고, 본격적인 바늘 찾기(이것을 스크리닝이라 부른다)부터였다. 말이 쉽지 1만 개 이상의 물질을 검토한다는 것은 참 고단한 일이었다.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물질 스크리닝을 했다. 출근하면 바로 평가 돌리고, 점심 먹고 한 판 더, 퇴근 전에도 한 판 더.. 이렇게 꼬박 하루를 말도 없이 스크리닝에만 쏟아도 나를 기다리는 라이브러리는 여전히 많았다. 고가의 전문 시약과 엄청난 양의 플라스틱 웨어를 소비했다. 통계적 유의성을 확보하고 그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선도 물질을 몇 백개로 줄였다. 몇 백개를 다시 몇십 개로, 그걸 또다시 몇 개로.. 세포 독성(물질 처리에 따라 피부 세포가 죽고 사는지), A 단백질에 대한 활성 여부를 반복적으로 검토하고 나서 비로소 제대로 된 후보 물질을 손에 꼽게 되었다. 이렇게 얻은 후보 물질들을 lead compound (선도 물질)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이때까지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하였다. 라이브러리를 공급한 기관에서는 비용을 지불해야 우리가 알고 싶은 물질의 정보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돈을 주고, 계약을 맺고, 그렇게 물질 정보를 얻었다. 이것으로 끝일까? 아니다. 당시 합성 연구를 하던 팀에서 전문가들이 lead compound의 기본 형태를 바탕으로 십여 개의 물질을 합성했다. 화학 물질의 구조와 작용기에 따라 물질의 활성도가 달라진다. 그것을 다시 또 테스트, 테스트, 테스트. 반복적인 세포 실험으로 확인된 것이 과연 동물에서도 재현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몇 달간 동물실험을 했다. 지금은 화장품 개발에 동물 실험을 하지 않지만 당시는 가능했다. 그렇게 동물들의 희생 속에 최종 후보로 가장 똘똘한 1개가 나왔다! 이제 최종 단계는 임상. 사람에게서도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온다면 정말 고객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입사 이래 만 3년을 꼬박 매달린 프로젝트였기에 누구보다 더 기대가 컸다. 


결과는? 안타깝게도 임상에서 좋은 효능을 보이지 않았다. 동물실험에서 아무리 괜찮아도 사람에게서 결과가 별로인 경우가 부지기수지만 하필이면 내 과제에서 그럴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다. 과제의 결과물은 세상 어디에도 '제품'으로 탄생하지 못했다. 회사의 경비는 엄청나게 지출되었지만 완성품으로 연결되지 못한 사례다. 3년 걸린 개발 기간과 그로 인해 놓친 기회비용 또한 어마어마하다. 이후 몇 년이 지나 '서랍 속 기술'로 언급된 적이 있었지만 이내 다시 서랍 속으로 조용히 넣어야만 했다. 


고객 입장에서는 TMI이고 <안물 안궁> 일지도 모르는 괜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연구는 늘 이렇다. 될 것 같지만, 또는 되어야만 한다는 희망 속에 진행하지만, 막상 고객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안정도가 나오지 않아서, 이상한 냄새가 나서, 효능은 좋지만 너무 비싼 원료라서, 해외에 수출하려고 보니 등록하기가 어려워서. 회사의 투자 비용도 그렇지만 연구원으로서 노력과 수고, 투여한 시간과 고생이 마치 아무 성과도 아닌냥 사라지고 만다. 


개인적으로는 하나의 제품이 연구개발을 통해 탄생해서 판매되기까지 드러나지 않는 어떤 일들이 있음을 안다면, (간혹 듣게 되는) 원가의 함정에 대해 고객들이 조금이나마 이해를 해주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왜 고객이 회사의 연구 실패 비용까지 부담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많은 실패 속에 성공한 제품으로 어느 정도 비용을 보상받아야 하는 부분이 있지 않겠냐고 항변하고 싶다. 그렇게 해서 돈을 벌어야 새롭게 더 좋은 상품을 연구 개발하는 순환고리가 생기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제품 하나가 탄생하기까지 실패와 포기의 비용도 조금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연구원 개인의 의견일 뿐, 회사의 공식적인 입장은 아닙니다). 


실패했던 과거의 일을 드러내 보니 괜히 또 울컥해졌지만 연구개발은 늘 진행 중이다. 다음엔 성공했던 연구의 썰을 풀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사진: istockphoto.co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