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생일 선물로 받고 싶은 것이 있어. 애플워치 에르메스”
아내의 물음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욕심이란 것이 생기는 때가 있다. 열심히 사과농장을 꾸려 왔다. 다양한 애플 기기를 소유하고 사용하는데 애플워치도 하나에 속했다. 이 제품은 특히 나이키나 에르메스와 같은 브랜드와 콜라보를 통해 제한된 워치 페이스와 밴드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에르메스 버전은 유독 오래전부터 갖고 싶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비싼 가격만큼 지불의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항상 No라는 답변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시계라는 기능에 충실한 기기 이상의 가치를 일부러 무시하려고 하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고 제품을 들이는 경우가 많긴 하다. 솔직히 단순 개봉품부터 적당한 감가상각이 더해진 중고를 잘 찾으면 적절한 가격대로 구할 수 있다. 지금도 당근이나 중고나라에 검색어를 넣어보면 공식 가격보다 최소한 10~20만 원 정도 낮은 가격에 원하는 사양을 (때로는 개인적으로 추가한 것까지 더해서) 즉시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뭐랄까, 이 비싼 것을 꼭 제 가격 주고 사고 싶은 그런 욕심이 생겼던 것이다. 그렇게 해야 나를 위한 선물을 제대로 준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기분의 시작은 어디에서 왔을까.
나이가 들면서 사소한 것에 괜히 마음이 상하고 괜한 허전함을 느끼고 있다. 더 현명한 사람이 되기보다 오히려 내 거 챙기려는 욕심만 늘고, 다른 사람에게 한 소리 듣기는 죽기보다 싫어지는 것이 희한하다. 남들 눈치를 여전히 보는 편이지만 반대급부로 생각과 행동은 더 경직되고 있다. 모든 경우에 그렇다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더 심하게 극단으로 몰리는 기분이다.
특히 50살이 가까워 오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과 함께 삶의 허무함, 직장 생활의 공허, 일상의 무력감이 나를 감싸고 있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노력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왔는데 나도 모르게 앞만 보고 달려왔었나 보다. 자신과 타인을 위해 보냈던 시간과 노력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젠 잘 모르겠다. 책임질 것, 해야 할 것, 해야만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것, 그리고 판단의 기준이 내가 아닌 ‘우리' 또는 ‘다른 누구'인 환경들이 힘들다. 이런 작은 생각과 경험들에서 오는 상실감이 켜켜이 쌓여 눈덩이처럼 하나로 불어나 버린 것일까. 사실 얼마 전에는 극심한 우울감이 찾아와 깜짝 놀라게 되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가볍게 왔다가 사라지는 감정으로 치부할 수준이 아니었다. 이런 상태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어 얼른 스스로를 다독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자기 위로와 마음 챙김의 기회를 가지라고 몸과 마음이 나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가급적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으려 한다.
전문가의 도움 받기 말고 또 다른 적극적 해소 행위가 하필 비싼 물건을 사는 것이어야 하는지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출시될 때부터 갖고 싶었던, 그러나 가지지 못했던 무엇에 대한 열망을 이참에 핑계 삼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이 아니라 최근 들어 의기소침해지고 즐거운 것에도 슬픈 것에도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을 만큼 감정이 무뎌져 가는 나를 억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지금 당장 무엇이라도 너가 원하는 것을 하나 해 봐'라는 내면의 소리가 마침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와 달리 중고제품이 아니라 아무도 손대지 않았던 새 제품을 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이해와 설득은 불필요 하다. 그저 어린 애 마냥 갖고 싶은 걸 이제라도 손에 꼭 넣고 싶은 것뿐이다. 눈치보지 말고, 안되는 이유 찾지 말고, 한껏 나를 위한 소비를 하는 자유의 기분을 만끽하라고 말이다.
주문을 하고 나니 이게 대체 뭐라고, 지난 몇 년 동안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 답답했던 마음에 작은 구멍 하나가 뿅 뚫린 기분이다. 작은 틈 사이로 솔직한 감정의 바람이 드나들길 바라본다. 그러고보니 감정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이 이성적 판단에 거하게 판정승을 거둘 수 있게 내버려 두는 것도 그리 나쁘지 만은 않다.
(이미지 출처: appl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