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동료 중에 항상 조곤조곤 말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이 있다. 같이 모여 수다를 떨던 중 그가 한 말에 놀란 적이 있다. 배우자에게는 집에서 짜증을 부린다는 것이다.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던 터라 회사에서 모습과 너무 다르다고 했다.
‘회사에서는 그럴 일이 없잖아요’
회사에서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이 사실일까? 정말 짜증이 날 일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어찌 사람 사는 곳에서 갈등이 없겠는가. 우선은 서로 조심하면서 대하면서 갈등을 피하거나, 갈등 관계가 있더라도 쉬이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와의 관계가 동등했는지 아니면 상하인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어쨌든 회사에서는 그럴 일 없는 - 짜증보다는 참고 견디는 - 상황을 서로 만들어 가는 것이 훨씬 의식적이긴 하다.
‘기복을 견디는 관계가 진정한 관계’라는 정지우 변호사의 글을 읽고 기복을 드러내지 않는 것과 드러난 것을 견디는 것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기복이란 땅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한다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그것보다는 오히려 감정의 수사로서 더 쓰이는 듯싶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는 건 기분이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는 것이 잦다는 뜻이다.
회사에서는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누구 말마따나 그럴 일이 별로 없을 수 있기도 하고, 업무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건 프로답지 못하다는 편견이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다. 물론 감정이 상하는 경우가 있으나 오랜 직장 생활의 노하우가 생겼는지 (아니면 무뎌졌는지) 그 감정을 오래 지속하지 않는 편이다. 날이 갈수록 회사에서는 일과 나를 분리하는 기술이 늘어나는 것 같다.
반면 가정에서 수시로 감정을 드러낸다. 특히 배우자에게 그렇다. 조심스럽게 상대의 눈치를 살피던 시절은 어디에 갔나. 함께 살아온 날이 많다 보니 편해졌다는 말로 이유를 함축해 버린다. 즉 이제 서로 알만큼 아는 사이라는 그럴듯한 핑계를 찾는 셈이다.
잘 모르고 살았는데 나는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이었다. 잘 있다가도 어떤 하나의 작은 사건이나 행동, 말투에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지곤 한다. 변한 기분을 가정에서 숨기지 않는 것은 숨기는데 드는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아서 이다. 회사에서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집이라는 공간, 가족이라는 대상에게만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기로 한 계기가 따로 있었는지 모르겠다. 완벽한 아빠나 배우자가 되기를 포기한 순간이었을까? 원글에서 작가가 하는 말처럼 그럴 때 ‘짐'을 나눠 갖는 것 - 즉 상대의 기복이 생겼을 때 서로 이해하고 달래고 함께 견디는 것 - 이 진정한 관계의 시작일 것이다.
문제는 기복을 숨기지 않고 지나치게 드러내면 당사자인 내 마음에 남은 감정과 앙금이 덜 쌓일지는 몰라도 상대에게 그 짐을 넘기는 것에 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존중은 회사에만 있지 않다. 직장 생활을 열심히 해야 하는 현재는 여전히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 만나는 사람들에게 더 친절하고, 더 상냥한 만큼 사실 더 자기기만적이기도 하다. 자기기만이 불필요한 가족이니까 나의 감정 기복을 당연히 받아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의식적으로, 형식적으로 지킬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함께 견디기 위한 상호 존중의 태도이다. 기복이 온 사람은 상대에게 나의 상태를 존중해 주기 바라는 마음, 상대는 그것을 이해해서 받아주려는 존중의 마음. 그러한 존중의 태도를 잃지 않는 것이야 말로 타인의 기복을 견뎌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