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필요한 건 실력과 업무에 필요한 역량이다. 어떤 성과를 달성하는데 요구하는 기술과 역량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자리에 가는 것은 아니다. 사다리 또는 피라미드의 위를 차지하는 건 쉽지 않다. 누군가 선택받는 사람이 있으면 도태되는 사람이 있다. 선택을 원하는 사람, 선택을 하고자 하는 사람,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 되려 선택을 피하고 싶은 사람 등 각자의 입장이 다르다.
나는 선택을 받고 싶은 사람이었다.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몇 가지 보여줘야 할 성과가 필요했다. 성과는 일로써 보여주면 된다. 이와 함께 직급에 맞는 (또는 필요한) 역량과 준비도 갖추고 싶었다. 리더십에 대해 공부하고 관련된 서적을 읽고 사람을 관리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면서 반면교사를 삼았다. 내가 가진 강점이 있다면 그걸 적극 활용하려고 했었다. 이렇게 열심히 해두면 막상 그 자리에 갔을 때 잘 써먹으리라 믿었다.
어찌 되었든 승진에 실패했다. 아직 기회가 있다고? 가능성은 (당연히) 반반이다. 무게 중심은 조금 다르다. 내가 느끼는 무게의 축은 승진하지 못할 것이라는 곳으로 매년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 작년에 상무님과의 면담에서 ‘네가 팀장을 못하는 것이 절대 역량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딴에는 위로의 말이었을 텐데 솔직히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가 말한 역량은 업무를 처리하는 능력에 대해서만 한정된 것임을 왜 모르겠나. 조직이 원하는 역량은 다양하다. 상사가 원하는 직속 부하의 태도나 역량 또한 각양각색이다. 만약 공석이 생겼을 때 인사권을 가진 사람 관점에서 나를 선뜻 택할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져보면 의외로 답은 쉽게 내려지기도 한다. 메타인지를 잘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믿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 열심히 챙겨두었나 싶다. 만약 당신이 승진의 문턱에서 선택받지 못하고 있다면 누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행동과 판단을 하는지 확인해 보면 알 것이다.
승진에 실패했다고 인생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자연인으로서 나의 삶과 행동, 사상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조직 생활에 한정했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결과만 따질 수는 없다. 중간중간 이룬 성취와 경험들의 소중함을 어찌 뭉뚱그려 전부 실패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일과 사람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실패의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은 이루고자 했던 목표(승진)를 위해 준비한 시간과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다 보니 지난 몇 년 동안의 많은 행동과 준비가 모두 부정받는 것만 같아 실망스럽다. 그러면서 공들인 노력이 어쩌면 지나치게 목적성이 강했던, 그래서 진정성이란 애초에 없는 행위는 아니었던가 자신을 자책하는 극단적인 마음마저 생겼다.
그런 부정의 감정은 나에게만 그치지 않는다. 안타깝지만 다른 동료에게도 영향을 준다. 이제 동료들에게 많은 관심이 향하지 않는다. 어차피 내가 100의 노력을 기울이나, 50의 관심 정도만 가지나 달라질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인다고 해서 승진시킬 권한을 가진 상사가 생각을 제고할 것 같지 않다는 것, 그러니까 나서서 동료들을 이끌 명분도 이유도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런 마음이 들면 미안하다. 예전엔 눈에 띄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있는 일만 적당하게 처리하고 퇴근하고 싶어 진다. 행여 나에 대해 칭찬이라도 할라치면 무슨 일을 더 시키려고 그러는 건가 의심스럽다. 이런 태도의 장점(?)은 예전보다 훨씬 더 용기가 생긴다는 것이다. 아니면 아니라고, 싫으면 싫다고 솔직하게 말하게 되었다. 눈치보면서 쩔쩔 매지 않아도 되는 까닭이다.
이런 생각이 지나친 피해 의식이라는 것도 역시 잘 알고 있다. 그걸 떨쳐 버리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그렇다고 매번 상사를 볼 때마다 울분에 차있거나 나쁜 마음을 갖지 않는다. 후배나 동료들을 볼 때 대충 또는 적당히 대하는 태도 역시 아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당연히 해결 한다. 같이 고민하고, 해결이 필요할 땐 나서고, 조언을 하고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도모한다. 일하는 방식 또한 이전과 크게 다름이 없다. 갑자기 해야 할 업무를 망치거나 엉망으로 내버려 둘 기만적인 용기조차 없다. 그럼에도 나는 느낀다. 가랑비에 젖어들 듯, 마음 한 구석부터 이제는 큰 욕심부리지 말고 지내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생각이 쌓여 간다는 것을.
사실은 이율배반적 가치관이 마음속에서 계속 충돌하고 있어서 괴롭다. 요즘의 우울한 감정을 유발하는 원인의 하나가 이것임을 문득 알아차렸다. 한쪽에선 이제 적당하게 일하면 된다고 부추기고, 다른 한쪽은 여전히 승진 가능성을 놓지 못하는 욕심이 남아 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갈팡질팡하는 마음, 그 사이에서 무기력을 느끼는 나. 당분간은 그 둘의 싸움을 계속 지켜봐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미지 출처: https://w5coaching.com/success-begins-mindset-mindset-ready-succ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