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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 Mar 30. 2023

회사원의 비자발적 유튜브 출연기

회사를 다니다 보면 원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열심히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원래는 내 자리가 아니었는데 사정이 꼬이고 이런저런 이유로 ‘사실은 네가 적임자라며’ 선발되는 상황도 있다. 지난 몇 달에 걸쳐 있었던 유튜브 출연이 딱 그렇다.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인데 상사가 대뜸, 네가 좀 해야겠다는 부탁을 하였다. 배경 설명을 듣고 보니 대단히 설득적이진 않지만 고심 끝에 결정된 사항일 텐데 싫다고 거절하기 어려웠다. 개인적인 흥미도 약간 있어서 - 전문가의 참여와 자본이 투여된 영상 작업이 궁금했기에 - 해보겠다는 답을 드렸다.


화장품에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고 기술을 알리는 것이 채널의 기본적인 목표이다. 대놓고 브랜드와 제품 이름을 노출하지는 않아야 한다. 그렇지만 검색해 보면 충분히 알아챌 수는 있다. 약간은 알쓸신잡 같은 분위기가 되어야 하지만 대단히 대본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소비자 대신 질문도 하고 생명과학자가 풀어주는 나름의 쉬운(?) 설명을 받아 주는 역할의 연예인이 사회를 보며 이끌어 간다…


이러한 다양한 제약조건이 있다 보니 콘텐츠 제작이 까다롭기 그지없다. 개인의 자격이 아니기 때문에 훨씬 어렵다. 회사를 노출하진 않더라도 불분명하거나 오해를 살 수 있는 정보를 말하면 법적 규제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대본 작업에 상당히 공을 들여야 했다. 한 번의 영상 제작을 위해 정보의 정확성 여부에 대한 근거와 표현의 수위 조절, 전달하는 뉘앙스 같은 세부적인 논의가 오랫동안 지속 되었다. 본사의 업무 담당자와 대행사가 중간에서 함께 대본 작업을 하지만, 그들은 비전공자이라서 연구원인 나와 또 한 명의 동료는 출연자이면서 동시에 자문 역할을 하며 대본 작업에 함께 참여했다. 영상이 최종 노출되는 대상은 불특정 다수이므로 더 쉽고 간결하게, 그리고 적절한 비유가 필요하여 여간 고된 작업이 아니었다. 대본을 받으면 코멘트를 주고, 불필요하거나 맞지 않는 것은 지우거나 바꾸고, 제공된 정보는 다시 대본에 적합하도록 바꿔주고.. 이런 피드백이 수 차례 오고 가서야 비로소 촬영용 대본이 완성될 수 있었다.


촬영의 경우는 정반대의 입장이다. 연구원들은 이런 일에 비전문가이고 어지간해서는 경험해 보기 어렵기 때문에 상당히 걱정을 많이 했다. 대본을 외우는 것은 차라리 쉬운 일이다. (놀라며)라는 지시 문구를 보고 어떻게 놀라야 할까, 화들짝 놀라면 좋을지, 무덤덤하게 놀라는 척해야 할지, 놀라는 표정이 제대로 안 잡히면 어쩌지, 다시 찍자고 하면 전혀 다르게 놀라는 행동을 해야 하는지 등을 고민하다 보니 연기자란 참 힘든 직업이겠구나 짐작이 가능했다. 초반 촬영 시, 아무도 대꾸해 주지 않는데 혼자서 연기하는 연예인을 보니, 역시 연예인이야.. 하는 놀라움의 연속이다. 더더욱 움츠려 드는 내 어깨. 이러다 하루 종일 NG만 내는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의외로 촬영 시간은 짧고 간결했다. 솔직히 처음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정신도 없었거니와, 이렇게 찍어도 되나 싶어서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결과물을 보면 참으로 놀라워서 편집이 이래서 중요하구나, 각 분야마다 전문가라는 타이틀이 왜 있는지에 대해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벌써 두 번의 공식적인 촬영을 끝냈다. 출연 전에 가졌던 질문-개인이 아닌 전문가의 유튜브 촬영이란 어떤 것일까-에는 충분히 답을 얻었다. 완성도 있는 결과물을 얻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여러 사람이 협업하는 것은 어쩐지 뻔한 레토릭 같으면서도 실제로 현실에서 잘 작동하는 것을 경험했다. 항상 이런 영상 업무를 하는 분들에겐 별다를 바 없는 이벤트일 수 있지만, 여전히 관찰자인 내 입장에서는 공동 작업의 결과가 현실화되는 과정의 참여와 기회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바이다. 회사 일 역시 분명히 공동 작업의 결과물이지만 연구개발의 특성상 긴 호흡이 요구되므로 즉각적인 피드백이 없다는 건 아쉽다. 물론 짧은 시간에 집중하여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이 고단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확실히 손에 잡히는 결과물이 얻어지면 만족스러운 부분이 있다.


https://youtube.com/@skinproject


특히 이 작업을 하면서 나의 감동 포인트는 또 다른 곳에도 있었다. 본사 담당자는 대본 작업부터 시작하여 촬영 내내 함께 모니터링을 해주거니와, 영상 편집본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검토하고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상당한 디테일을 챙기는 것을 보았다. 혹시 찍고 난 뒤에 오류는 없는지 살피고, 영상의 톤 앤 매너를 챙기며, 출연자가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들어낼 수 있으니 말해 달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에 대한 열정을 반영하는 바로미터는 아니지만, 다음 날 아침 출근해서 메일함을 열었을 때 도착해 있는, 밤에 보낸 꼼꼼한 그의 메일은 인상적이었다. 나도 현재 하는 업무에 대한 책임과 역할을 다하고 있음에도 후배가 보여주는 태도를 보며 배울 수 있다는 건 썩 괜찮은 경험이다. 말 그대로 ‘어쩌다 출연’이었지만 오히려 얻은 것이 많으니 성공적인 참여였다고 결론 내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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