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회사 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게 되었다. 책을 내기 전에는 익명의 작가라는 가면 뒤에서 자유롭게, 때론 날이 선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있었다. 출간 이후엔 가끔 동료들이 ‘당신의 브런치를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를 직간접적으로 알려주었기에 눈치를 보는 것이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어렸을 땐 할 말도 많았거니와 고민의 결이 더 치열했던 것도 맞다. 그러나 요즘 회사 이야기가 줄어든 것은 조금 다른 이유이다. 연차가 쌓이니 어떤 결정 뒤에 보이지 않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추측하는 힘이 더해지고, 이해하지 못했던 상사의 까탈스러움도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라고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워진다. 무엇보다 일 자체가 새로움 보다는 반복적인 변주 이상을 넘지 못한다. 그러니 일에 대한 고민이 줄고, 생각이 줄어드니 별로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 아닌가 싶다.
매일매일이 비슷한 하루의 연속이었다.
문의와 협조의 메일에 답하고, 의견을 주고, 일을 조율하고, 결과를 해석하며 결정하는 그런 날들. 계절의 바뀜 조차 설렘으로 이끌어지지 못하는 시간이 쌓여갔다. 컴퓨터의 배경 화면을 바꾸며 기분을 전환하고 회사의 익명 게시판을 들락거릴 때야 겨우 에너지를 허비하는 느낌.
그 와중에 갑자기 발표 준비를 2건이나 하게 되었다. 하나는 꽤 오래전 동료였던 후배가 최근 교수로 임용되어 가면서 부탁한 초청 세미나, 다른 하나는 연구소 내부의 성과 발표회에서 꼭지 하나를 맡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팀장의 제안. 파트 리더이자 많은 사람들을 매니징 한다는 핑계로 다른 연구원들과 달리 실험을 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런 기회가 주어지면 일단 망설여진다. 기술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다른 이야기를 풀어내야 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다른 연구원들이 듣는 자리에서 연구개발의 다른 관점을 마치 대단한 것인 양 전달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조금 부끄럽게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그럴듯하게 자료를 만들어 내는 편이다. 여기저기 흩어진 단편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꿰어 전달하는 것에 자신 있다. 음.. 정말이냐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발표 자료의 경우, 품의가 나자마자 후배 하나가 재미있게 봤다며 말을 건넨 까닭이다. 오늘은 또 어떤 선배가 말하길, 다른 사람 자료는 안 들여다봐도 내 것은 일부러 본다, 어딘가 남다를 것 같기 때문에라고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기 기대대로였다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 앞에서는 손사래를 치더라도 돌아서면 괜스레 으쓱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힘이 있다. ‘아직 죽지 않았군’
나는 전형성을 따르는 자료에는 알러지가 있다. 물론 발표 자리의 격식과 의미, 듣는 청중의 성격과 수준에 따라 다분히 재미는 단 1도 없는 자료를 만들어야 할 때가 있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편이다. 눈치 챙겨서 낄끼빠빠해야 조직 생활에서 적당히 살아남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전형적이고 재미 하나도 없는 자료 만들기를 피할 수만 있다면 조금이라도 다르게 만들고 싶어 한다. 뻔한 구조의 파워포인트 자료를 앞에 띄우고 이야기할 때면 나 스스로 발표자로서 재미도 없을뿐더러, 듣는 사람에게는 더욱 심할 것이란 걸 알기에 그렇다. 대부분의 경우 발표자 딴에는 대단한 재미가 있더라도 청중에겐 지루한 경우가 다반사임을 많이 경험해 봤기 때문에 더욱 잘 알고 있다.
무슨 내용을 말해 줄까, 어떻게 전달해야 효과적일까, 콘셉트를 어느 방향으로 잡아야 좋을까. 이런 즐거운 고민하는 시간을 오랜만에 경험해 본다. 남들은 발표 자료 준비를 부담스러워 하지만 난 별로 그렇지 않다. 그동안 후배들에게 기회를 준다는 명목으로, 그리고 실제로 별로 발표할 내용도 부족하여 마다했더니 존재감이 없어진, 그런 느낌이 있었다. 나는야 극 I(내향형)의 성향이지만 은근히 무대를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발표 자료를 만들다 보니 지루했던 일상에 비로소 적당한 긴장감이 맴돈다. 기분이 좋다.
회사에서 진행하는 발표회의 효용성에 대한 논쟁은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 갑론을박의 그야말로 오래된 주제이다. 할 일이나 잘하면 될 것이지, 보여 주기식 행사 때문에 정작 일을 못한다는 불만이 있다. 동감한다. 본질은 발표가 아니라 일 그 자체니까 말이다. 행정주의적 발상과 쇼잉에만 목매어 천하제일 자랑하기 대회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때로는 적절하게 보여주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런 행사 덕분에 그동안의 과정을 (억지로라도) 정리하고 남들에게 전달하는 기회가 필요한 일들이 있다. 적당한 시기를 놓치면 마치 아무 일도 안 한 것처럼 되어 버릴 수 있는 성격의 업무도 존재하는 법이다. 그렇다고 어디 나서서 하자니 좀 그러면서, 판 깔아주면 마지못해 그러나 신명 나게 미친 듯이 풀어낼 살풀이 같은 그런 일들. 지루했던 일상에 기회를 준 팀장에게 그리고 초청해 준 후배에게 감사하다.
후담. 그럴듯하게 만들어 내는 것만큼 빠르게 작업하는 편인데 어쩐지 지나치게 빨리 완성되었다. 발표할 내용이야 뻔하지만 어떤 옷을 입혀서 보여주는지가 중요하다. 보통은 그걸 정하는 것이 어려운 법이다. 이번에는 콘셉트가 금방 정해져 버렸다. 뚝딱 만들고 보니 자료는 맘에 들지만 너무 빨리 끝내 버려서 아쉽다.
돌려줘, 나의 긴장감과 설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