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하고도 반 만에 미용실을 찾았다. 집에서부터 빠른 걸음으로 20여 분은 족히 걸어야 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코 앞에도 널린 여느 미용실을 마다하고 굳이 거길 찾게 된 건, 사실 남성 헤어컷 50% 가격 때문이었다. 아, 처음은 아내의 제안이었다.
‘싼 맛에 잘라보고 마음에 안 들면 안 간다?!’
남자 머리라고 무조건 싸게 관리하면 안 된다는 것이 나름의 철칙이지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서비스업의 비용이 부담되지 않을 수 없다. 거의 두어 달에 한 번 머리를 자르는 편이니 일 년에 많아야 예닐곱 횟수이다. 그 돈 아껴서 뭐 하랴 싶고, 딴에는 자존심에 나도 고급진 곳에서 그루밍에 투자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는 않지만 막상 결과물은 비슷한데 앞자리가 다른 금액을 지불하는 건 좋은 소비는 아닌 것 같은, 효율성에 기반한 사고를 하면 아내의 말을 거역할 이유 또한 없다.
시작은 비용 때문이었으나 머리를 다듬어 주는 디자이너 선생님의 실력도 좋고, 내 스타일에 맞게 잘해주는 것 같아 벌써 다섯 번이나 내 머리를 맡기게 되었다. 현재 사는 곳으로 이사 온 지 3년이 되었는데 이제야 마음 놓고 이발할 수 있는 단골집을 만든 셈이다. 그래서인지 다소곳이 앉아 머리를 부탁할 때 특별히 주문을 하지 않아도 되어 좋다. ‘어떤 스타일로 해드릴까요?’에 대한 별다른 주문이 없어도 적당히 알아서 해주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과의 스몰 토크는 늘 어색하다. 원래 이발할 때도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헤어 디자이너와 공통의 화제를 발견하는 노력을 크게 들이고 싶지 않기도 하거니와, 그저 그런 시시콜콜한 잡담들로 어색한 기운의 적막을 깨는 것도 작위적이란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가끔은 아예 작정하고 시작부터 눈 감고 ‘말 걸지 마시오’ 모드를 작동하기도 하였다. 이 디자이너쌤에게 머리를 하는 이유 중 하나도, 한두 마디 말은 걸지만 나머지 시간은 조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디자이너쌤이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도하였다.
사연인 즉, 지난달에 일본에서 열리는 무슨 무슨 헤어 박람회를 다녀왔다고 했다. 가서 보니 다들 너무 열심히들 살고 있더라는 것이다. 더불어 태어나 처음 가보는 일본이라 모든 것이 생소하고 기억에 남았을 것이 분명했다.
‘한 달에 몇 천을 번데요’
‘저 아직 20대인데, 너무 안일하게 지내왔나 봐요‘
’어떤 분 그러시더라고요. 1년을 미치면 10년이 편하고, 3년을 미치면 평생이 편하다고‘
’그래서 이번 달부터 한 번 저도 맘 먹고 독하게 일해볼까 해요‘
‘전에는 휴일을 가졌지만 6월엔 하루도 안 쉴거에요’
음, 그래도 워라밸은 소중하지 않을까요? 하는 찬물을 끼얹는 대답을 했다만 바로 후회했다. 큰맘 먹고 자기 청춘을 불사를 결심을 한 사람에게 못할 짓을 한 듯하였다. 여기에 더해 그녀는 여태 한 번도 하지 않던 영업을 시도했다. 두피 스케일링 가격이 원래 2만 원인데 행사가로 5천 원에 해주겠다는 솔깃한 제안이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하고 싶다는 빌드업된 스토리를 다 듣고 난 뒤라, 나름 이제는 단골이자 또 인생의 연장자(?)로서 이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세상은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지 잠깐 망설였다.
‘다음에 할게요. 죄송해요’
뭔가 내 두피 상태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보여주며 영업을 했더라면 혹했을지도 모르겠다. 평소에 두피 가려움이나 고민이 있는 나였다면 넘어갔을 수도 있다. 니즈가 없는 상황에서 훅치고 들어오니 별로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뭔가 제안을 받고 거절하는 행동에는, 마치 내가 거절을 당한 것 같은 찜찜함이 남는 법이다.
마지막까지 다 마치고 나자 비타민이 들어간 몇 가지 제품을 작은 비닐팩에 담고 손편지까지 써서 마련한 작은 선물을 주었다. 이전에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다. 정말 그녀 말마따나 일본에서의 경험이 큰 결심을 하게 만든 것이려나.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배웅하는 디자이너쌤을 뒤로하고 나오는 길은 뭔가 묘한 기분이었다. 날은 지나치게 화창하고 맑았다. 적당히 내리쬐는 햇빛과 그늘 아래 서늘함은 이 시기가 아니면 누릴 수 없는 호사스러움의 절정을 만들어 내는 날이었다.
그제야 나는 덜어낸 머리카락의 무게만큼이나 가벼워진 기분이었음에도, 나는 어쩐지 뒷맛이 조금 씁쓸해졌다. 같은 월급쟁이지만 일요일 아침의 맑은 기운을 여유롭게 느낄 수 있는 나와 달리 좁은 공간에서 손님을 계속 바꿔가며 응대를 해야 하는 그녀의 모습이 겹쳐졌다. 마음먹은 바 있어 훨씬 적극적으로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대견하면서도, (진부하지만) 밥벌이의 고단함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내 손에 쥐어진 비타민 선물이 필요한 건 정작 그녀가 아닐까 싶었다.
’삿포로 가보셨어요?‘
’아, 가봤죠. 거기 좋죠‘
’겨울에 별을 보며 하는 노천 온천이 그렇게 좋다면서요, 저 그래서 거기 가보려고요 꼭‘
’여긴 휴가가 어떻게 돼요? 맘대로 쓸 수 있나요?‘
’들어온 지 2년이 안되면 1박 2일, 2년 넘으면 2박 3일 가능해요. 근데 저는 2년 넘어서, 3일 동안이나 휴가를 쓸 짬이 있다고요 호호‘
나는 이번 겨울 그녀가 꼭 삿포로를 찾기를, 그리고 싸늘한 공기와 따뜻한 온천의 이질적인 공간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고 응원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