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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 Sep 21. 2024

여행의 반전 매력

예전에 대전에서 학위 과정을 할 때는 종종 주말 버스를 타고 서울에 가곤 했다. 자가용이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가까운 유성 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다. 지금은 우등버스가 훨씬 더 보편적이지만 그땐 두 사람이 함께 앉는 일반 고속이 더 많았다. 가격도 더 저렴했으니 박봉의 대학원생 입장에서 사치를 부릴 형편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지만, 그땐 옆자리에 예쁜 여자분이 앉지는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안고 버스에 오르곤 했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달리 거의 모든 경우, 내 옆자리는 세상 튼튼하고 건장한 군인 아저씨였다. 앉는 자리는 매표소에서 표를 끊어주는 사람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분이 날 기억했다가 군인이 오면 굳이 아, 저 안경 쓴 사람 옆에 앉혀야지 하는 마음을 먹었을 리 없다. 그저 나의 운빨을 얄궂다고 해야 할까.


헬싱키에서 짧게 경유를 해서 아이슬란드의 케플라비크 공항까지 오는 비행시간은 대략 4시간 가까이 걸린다. 같은 유럽이라고 막연히 알았는데 왜 이리 오래 걸리나 싶어 구글 지도를 열어 보았다. 대뜸 이해가 되었다. 하긴 시차도 3시간이나 나니, 북쪽으로만 먼 것이 아니었다. 조금 일찍 비행기를 타서 앉아 있는데 내 옆자리가 유독 늦게까지 비어 있었다. 거의 모든 승객이 탈 때도 안 오길래, 이게 웬 떡이냐 싶어 기대를 했던 것이 실수였다. 마침 들어오는 엄마와 아기. 기껏해야 1살 조금 더 되었을까, 그런데 눈망울이 똘망하니 ’참 귀엽다’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뒤이어 해맑게 유모차를 접어들고 오는 아빠의 모습까지 보이고, 그들이 슬금슬금 내 앞으로 올 때 비로소 알아차렸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보통 아기들이 비행기를 타면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는 이륙과 착륙할 때 기압 차이로 인한 귀 아픔이라고 한다. 어른도 귀가 먹먹 해지는 경험은 같지만 침을 삼킨다거나, 그게 무엇인지 어떤 증상인지 알기 때문에 아기들처럼 떼쓰고 울지 않는다. 어쨌든 당연하게도 이 아기는 찡찡 거리며 울었는데 이륙할 때만의 그것이 아니었다. 4시간 중 (과장하면) 3시간 가까이 울고 떼를 쓰고 자기 아빠 자리에 꽂혀있는 비행기 메뉴와 정보판을 빼내어 나에게 던져 버리거나, 엄마와 아빠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며 계속 칭얼거리기를 반복하였다. 요즘 아이치고는(?) 아빠가 제시하는 태블릿의 애니메이션에도 전혀 관심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른의 손이 계속 필요했는데 나중에는 부모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예민한 아이를 키워 본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한 번 심사가 뒤틀린 아기는 달래기 어렵다. 그런데 나를 더 화나게 한 건 아이 아빠의 뻔뻔함이었다. 그렇게 아이가 울어재끼면 적어도 한 번쯤은 옆자리에 팔을 맞대고 앉은 나에게 미안하다 정도는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기대했다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을 가야겠다며 몇 번의 이동을 할 때마다 복도 쪽에 앉은 내가 일어나야 했음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래서 나도 처음 몇 번은 사람 좋은 자동반사 미소라도 지어줬지만 나중엔 표정 변화 없이 자리를 비켜 주기만 했다.


그나마 복도를 사이에 두고 앉은 옆자리 꼬마 아가씨는 서너 살은 되어 그런지 상대적으로 얌전했지만 가끔씩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엄마나 아빠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구사했다. 역시 놀라운 건 아이가 그렇게 소리를 내는대도 엄마나 아빠가 세상 편안하게 대하던 것이었다. 정황 상 경고를 한다거나 혼을 내는 태도는 아니었다. 바로 옆자리 아기도 버거운데 40-50cm 옆자리에서 가끔씩 화산 터지듯 폭발하는 아이에게도 시달려야 할 일이야? 아니, 내가 세상을 그렇게 나쁘게 살아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4시간 가까이 아무것도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양쪽 아기들로부터 괴롭힘을 받다 보니 ’이 여행이 어딘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까 ‘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렇게 아침부터 시작된 괴로운 여정은 쉬이 끝나지 않았다. 에어비앤비로 잡은 숙소의 호스트가 말이 많은 내향인(!)이라서, 안 그래도 지친 비행 끝에 좀 쉬고 싶었는데 1시간 가까이 잡담을 늘어놓아야 했다던가 - 물론 이전 게스트가 체크아웃을 늦게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수다로 시간을 채운 것도 있지만 - 알고 보니 현재 같이 거주하는 사람과 게이 커플이라는 것도 그냥 일반적인 여행의 모습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그와 나눈 대화는 유익했고 덕분에 아이슬란드라는 나라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가 깊어졌다. 그의 말에 의하면 연중행사로 하는 퀴어 퍼레이드가 무척 가족적인 분위기란다. 필리핀에서 태어난 그가 아이슬란드에 정착하기로 한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성소수자에게 관대한 면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의 상황 때문에 그냥 그렇게 느끼는 것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국립 박물관에서 찾은 책자 하나를 보니, 정말 나라의 운영 측면에서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려는 정책적인 의지와 노력이 확실히 드러난다는 것을 알았다.


여행이란 것이 뭐 예상과 바람대로 되기만 하겠나. 군인 아저씨가 옆에 앉는 건 다반사요, 몇 시간이고 바로 옆에서 울어대는 아기도 있고, 게스트를 붙잡고 한참을 떠들다가 혹시 피곤하면 참지 말고 얘기하라는 내향형 호스트를 만나기도 한다. 혹자는 그것을 여행의 묘미와 반전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비슷비슷한 생각과 사고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통제된 온실의 삶을 살다가 야생에 던져지는 것을, 여행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러므로 내 맘대로 풀리지 않는 야생에서의 며칠이, 어쩌면 편하게 살아온 몇 년의 삶보다 더 많은 경험과 가르침을 선사할 것이다. 아니, 이것도 기대하지 말아야지. 그냥 있는 그대로 주어진 상황에 대응하는 것이 기대와 실망의 반복 보다 더 괜찮은 여행의 모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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