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이 아닌 일을 다루는 태도
회사의 업무 용어 중에 R&R이라는 것이 있다.
Role & Responsibility를 줄인 표현으로, 번역하면 말 그대로 '역할과 책임'이 되겠다. 회사의 업무는 복잡하고 다양한 부서가 존재하다 보니 일을 구체적으로 나누지 않으면 곤란하다. 큰 부서별 역할로 나누지 않고 작은 팀 단위로 쪼개서 봐도 상황은 비슷하다. 각 팀별로 미션과 주어진 일이 생기는데 이를 완수하기 위해 활동하는 멤버들이 해야 할 일이 겹치지 않도록, 그리고 혼란스럽지 않도록 소위 R&R을 잘 정리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 R&R이 명확하지 않거나 잘 나눠 놓지 않으면 같은 일을 여러 명이 하기도 하고, 어떤 일은 아무도 안 하는 아찔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거, OOO님이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보고해야 하는데?’라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면…이라고 쓰다 보니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진다. 상상만으로도 걱정이 된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R&R의 구분이야말로 조직이 시스템화되어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어떤 목표를 달성하려면 대부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라, 각 기능 조직별로 해야 할 일이 쪼개져 내려온다. 세부 조직과 담당들은 그걸 다시 나누고 맡은 바 일을 수행함으로써 마침내 조각들이 합쳐지고 모여서 결국 원래의 목표에 도달한다는 개념이다. 그러니 각자 할 일과 그에 따른 역할과 책임이 정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때로는 역할이 모호하게 정의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아무리 역할 정의를 잘해두어도 “이런 일까지 우리 부서(또는 내가) 해야 하는 건가?” 싶은 질문이 드는 경우가 있다. 특히 부서의 성격 상 처리를 ‘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가진 일을 담당하는 부서에 있다 보니, 모호한 성격의 업무가 하필이면 내 앞에 떡하니 놓일 때가 있다. 아무리 봐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아닌데, 마땅히 다른 부서나 담당에게 넘기기 애매한 단계나 성격의 업무가 그렇다. 일례로 최근에 회사의 기술 홍보와 관련된 일을 잠시 담당하였다. 기술 포트폴리오 운영과 기획 업무의 중심에 내가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홍보 기사까지 작성할 역할은 아니었다(원래 홍보 담당 부서와 직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 논리로 홍보 기사의 초안을 작성하는 업무를 맡아서 하다 보니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드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그렇다고 당장 상사를 찾아가 ‘제가 이걸 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하겠어요’라고 말하기에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결국 적당한 수준의 완성도까지는 내가 처리하기로 결심했다. 그런 마음을 먹고 나니 짜증은 줄었다. 여전히 왜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명확하지 않아서 의무감으로 버티며 처리해 나갔다. 그런 상황을 직속 상사도 잘 알고 있었다. 상사의 도움과 조언으로 프레임을 짜는 역할을 잘 마쳤고, 담당 부서로 일을 잘 넘기면 된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막상 내가 어디까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인지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애매한 성격의 일도 별다른 불평 없이 ‘할 수 있는 수준에서는 최선을 다한다’라는 마음으로 하다 보니 가끔 하길 잘했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계속해서 이런 상황을 반갑게(?) 맞이하겠다는 건 아니다. 진짜로 내가 챙겨야 하는 더 중요한 우선순위의 일들을 먼저 봐야 하므로, 어느 순간에는 손에서 놓아야 하는 것이 맞다. 애매한 경계의 일들 마저도 적당한 책임을 지는 마음으로 쌓아가는 경험과 지금의 일이 썩 나쁘지는 않다. 그건 어쩌면 나의 역량이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애매한 일을 무조건 피하는 것도, 무작정 떠안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경계는 지키되, 필요한 순간에는 유연하게 넘어서는 것. 그 균형을 잡는 과정에서 나의 역량이 시험되고, 조금씩 확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