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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편식에 대한 변명

by nay

읽으려고 사놓은 책이 똑 떨어졌다. ‘똑 떨어진‘ 책들 때문에 잠깐 불안한 마음이 드는 시간을 보냈다. 읽을거리가 없다는 상황이 나를 조바심 나게 만들었다. 일 년에 몇 권 안 되는 책을 읽는 독자로서 자신 있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잠깐 들었다. 하나 수 권을 읽든, 수십 권을 읽어내는 독자든 책을 읽는 행위는 같은 것이니 부끄럽지는 않으려 한다. 읽던 책을 모두 완독 하지는 않는다. 가급적 끝을 내려는 의도는 늘 가지고 있다. 그런 의도와 함께 열심히 읽어보려 했으나 도저히 끝까지 가지 못한 책이 있는 반면, 끝으로 갈수록 한 장 한 장이 아쉽게 느껴지는 책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읽어내던 서재라는 곳간이 비었으니 새로운 것으로 채워야 할 때가 되었다.


고민의 시작은 주로 새로운 책을 찾아 나설 때 생긴다. 찾아 나선다고 썼지만 실은 그냥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보는 것이 전부라, 조금 머쓱한 면이 없잖아 있다. 다독 스타일이 아니기에 되려 책을 고르려면 신중해지게 된다. 가볍게 아무(!) 책이나 슥슥 담아본 뒤 마구잡이로 읽어내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만 써 놓으면 무척 신중한 책 고르기 과정처럼 비치는데 솔직히 말하면 잡식성이라, 실제로 일관된 흐름이 있다거나 선호하는 책의 종류는 구체적이지 않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 유명인이 추천해서 되게 좋다더라던가, 어떤 매체의 강력한 추천사가 붙어야 쉬이 장바구니에 담는 듯하다.


이런 독서의 편식성 덕분인지 자꾸 안전한 선택을 하게 된다. 즉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선호하는 문체나 주제를 다루는 작가의 신작을 찾아보거나, 평소 언젠가는 인생에 한 번은 읽어야 한다는 고전 같은 걸 뒤적거리게 되는 것이다. 때론 신작이 아니라도 관심 있는 작가의 책에서 살까 말까(읽을까 말까)를 고민하는 빈도가 잦아졌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작가는 유시민, 김영하, 무라카미 하루키, 알랭 드 보통, 신수정 … 이렇게 적어나가려다 보니, 역시나 머릿속에 딱 떠오르지 않고 막혀 버렸다. 별로 외우고 있는 작가의 이름도 많지 않다. 장르나 종류로 빨리 넘어가 보자. 예전에는 자기 계발서를 좋아했다. 지금은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거나, 생각할 시간을 마련해 주는 지적 자극서(?)가 마음에 든다.


음식은 편식이 좋지 않다 하는데 독서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무릇 세상만사 적절한 균형은 기본이다. 우리가 책을 읽는 행위를 통해 얻는 기대효과 중 하나는 편견을 낮추기 위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지식은 분명한 한계가 있고, 내가 보는 시야는 정말 넓디넓은 장면의 일부만을 다루고 있다(그럴 수밖에 없다). 독서는 그런 편협함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는 행위라고 믿고 있다. 같은 주제라도 다르게 해석하는 작가의 관점을 배울 수 있고, 서로 다른 나라와 시간, 경험을 간접적으로 배우는 기회로 역시 텍스트, 책만 한 것이 없다. 영상 매체도 유용한데 반해 어딘가 일방적인 전달 방식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텍스트를 탐하는 활자 중독까지는 아니라도, 무언가 읽고 있을 때 내 머릿속이 더 활발히 움직이는 느낌을 좋아한다.


그런데 정작 이제는 아는 작가의 책이 아니면 어째 손을 내밀어 집어드는데 망설이는 것이다. 이렇게 안전주의적 선택 경향이 생긴 이유는, 독자들의 평만 보고 구매했다가 끝까지 가지 못한 경험이 학습되어서라고 결론을 내린다. 같은 책이라도 사람마다 감동을 받는 문장이 다르고, 각자 처한 상황에서 각자의 해석이 나올 수 있으므로 그럴 수 있다. 또한 모든 책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작가에 따라 전반적인 완성도, 글의 수준이 다름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맘에 차지 않는 책을 끝내지 못한 경험에서 오는 자기변호라고 봐도 무방하다. 내 인생에는 아직 긴 시간이 주어져 있지만, 어쩐지 ’읽다가 그만 둘’ 책을 고르고 싶지 않은 욕심이 더 앞서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기도 바쁜 마당에, 도전적으로 잘 모르는 작가의 책을 보는 것은 일종의 시간 낭비라는 인식, 그리고 이를 줄이고자 하는 욕심도 분명히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런 편식으로 인해 독서 편향성이 생긴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으면 편안함을 느낀다.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 전개, 그만의 독특한 문체의 익숙함 등이 좋다. 그리고 그들의 글에 묻어 나는 유머 코드나 페이소스가 나와 잘 맞아, 어쩌면 작가들이 의도한 지점에서 웃음이 터지거나 감동을 받는다(고 혼자서 결론을 내려본다). 자극적인 맛의 음식을 먹으면 시간이 지나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것만 먹을 것이냐 물어보면, 그보다는 집밥을 찾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마침 아내가 책을 사겠다기에 불안했던 독서 중단의 시간이 끝나게 되었다. 위에서 말한 기준대로 몇 권의 책을 골라 리스트를 넘겨주었다. 하루 이틀 지나 도착한 택배 상자를 열어보니, 아니 웬걸 내가 보고자 했던 책이 한 권 없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취소가 되었다나. 대신 그녀가 담아 놓았던 소설책이 있었다. 내 기준에서는 선택받지 못했을 우연한 만남 때문인지 원래 읽으려던 책은 뒤로 하고 어쩐지 소설부터 손에 쥐었다. 편식쟁이지만 막상 새로운 것에 관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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