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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요 Dec 27. 2023

12월 마지막 주를 보내다가

문득 흘려보낸 일상 기억해 보기

크리스마스다! 했던 게 벌써 이틀이나 지났다. 

사실상 오늘이 27일이니 12월이, 아니 23년도가 4일만 지나면 끝이 난다. 1년이 금방이다.


헤엑... 이렇게나 빨리.. (*올해 직접 만든 눈사람)


퇴사하여 백수가 된 11월부터 정말 부지런하게 바쁘게 살면서도, 무기력하게 두 달이란 시간을 흘려보냈다.

남편이 11월 초에 당뇨 진단받은 이후로 노는 김에(?) 정말 열심히 식단을 챙겨주려 노력한 게 가장 컸다.


쿠팡프레쉬로 아침 일찍 도착한 양배추, 오이, 토마토 등의 야채를 모두 씻고 채칼로 얇게 썰어 올리브유+화이트발사믹식초를 친 샐러드를 메인으로, 통풍 때문에 빨간 고기류와 콩 종류를 못 먹으니 두부, 계란으로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나마 퓨린 함유량이 중간 정도인 닭가슴살은 어쩌다 한번 정도로 준비해 주고. 


집에 큰 압력밥솥 같은 인스턴트 팟이 있어서 계란은 맥반석 계란으로, 그리고 홈메이드 그릭요거트도 꾸준히 만들어서 떨어지지 않게 준비하였다. 리코타치즈도 만들어보니 먹을만해서 종종 만들었다.


키토식이 저탄수로 당뇨에 좋은 듯하여 종종 키토빵을 만들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차전차피 가루와 플랙시드밀(아마씨 가루)을 이용한 키토식빵 및 키토베이글, 크리스마스 때는 공식적으로 밀가루와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당뇨일을 위한 초코 생크림 케이크를 성공리에 만들기도 했다.


그 와중에 나만을 위한 요리와 베이킹도 잊지 않았다.

퇴사하고 가장 먼저 만든 건 가루왕자 이장우 레시피의 족발. 정말 맛있게 1kg를 만들어 두고두고 먹었지만, 다시는 안 만들 거다.. 그리고 갑자기 상큼한 레몬타르트가 먹고 싶어 후루룩 만들어보기도 하고, 시나몬롤에 갑자기 꽂혀서 거듭되는 실패에도 하루종일 미친 듯이 시나몬롤만 굽기도 했다. 그리고 냉동고에 넣어뒀던 치킨윙, 김치우동전골이나 명태회냉면, 핫하다는 신라면더레드 등을 조용히 아일랜드식탁 뒤에 숨어서 야금야금 먹어댔다. 


많이도 구웠다..



부엌에서 이런저런 야채 손질과 요리, 베이킹을 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흘러버린다. 식세기가 없는 관계로 건조대에 있는 그릇들을 정리하고 설거지만 해도 시간이 훌쩍 간다.


11월과 12월, 백수의 하루는 정말 평이했다.

밤 12시-1시쯤 잠들어서 아침에 9시-10시경 일어난다. 

(점점 갈수록 자는 시간과 기상시간이 조금씩 미뤄지긴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퀵포트로 물부터 끓인 후 찬물과 반반 섞어 500ml 한 컵을 공복에 천천히 마신다. (이것도 냉장고에 딸린 정수기가 온수 기능이 없어서...)

그리고는 전날 저녁에 절여둔 양배추 샐러드를 꺼내어 맥반석 계란 1-2개를 같이 곁들여먹는다. 거꾸로 식사법이라고 야채와 단백질 먼저 먹고 탄수화물을 뒤에 먹으면 혈당이 천천히 덜 올라간다는 실험결과를 알게되어 남편과 함께 실천하는 것 중 하나이다. 나는 당뇨는 아니지만 남편이 식단을 하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 최대한 함께 하려 했다. 나는 그 뒤에 먹고 싶으면 빵 한 조각, 혹은 밥 한 숟갈 정도를 더 먹는다. 

식사를 다 하고 나면 기계로 에스프레소를 내려 차가운 우유를 바로 섞어 미지근한 라떼를 만들어 마신다. 

그렇게 유튜브를 보던,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던 천천히 아점을 먹으면 벌써 12시가 훌쩍 넘어버린다.

뒷정리를 하면서 슬쩍 머릿속으로 생각한다.


.. 오늘은 뭐 하지?


옷정리를 하자. 철 지난여름옷들은 다 정리하여 안쪽으로 넣어버리고 겨울옷도 안 입는 건 다 골라내자.

묵혀놓은 제습제를 모두 꺼내어 버리고 새로 싹 채워 넣자.

유통기한 지난 양념, 소스들을 모두 정리하자. 

냉장고 정리를 하자. 구석구석 다 닦아주자.

운전면허증과 여권을 갱신하자. (그럼 사진을 찍어야겠네)

도서관에 책 반납을 해야 하니 간 김에 희망도서 신청했던 것도 찾으러 가자.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고 브런치 글도 쓰자.

친구가 굿노트 다이어리 템플릿을 선물로 줬으니 새롭게 기록을 시작해 보자.

사촌언니랑 놀러 가기로 했으니 어디로 갈지 동선을 짜보자.

1년이 넘게 방치해 둔 창고 정리를 하자.

친구가 놀러 온다고 하니 게스트룸도 싹 치우고 이불빨래도 해놓자.

선물용 빵을 구워보자, 굽는 김에 영상도 찍고 편집해 보자.


두 달 동안 조금씩, 하나씩 해나갔던 것들이다.

그렇게 매일매일 느긋하고 게으르게, 일상을 살아갔다.


중간중간 김범의 <바위가 되는 법> (리움미술관), 일리야 밀스타인의 <기억의 캐비닛> (마이아트뮤지엄) 등의 전시도 관람하고 집 근처 영화관에서 서울의 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등의 영화도, 대전까지 가서 캔들라이트 콘서트도 보고 왔다.


교회 친구의 집들이 겸 프렌즈기빙 파티와 크리스마스 파티에도 갔었고, 이때 입고 갈 크리스마스 어글리스웨터를 사러 빈티지샵에 편도 한 시간을 운전해서 혼자 다녀오기도 했다. 친한 친구와 함께 이탈리아 가정식 코스요리를 좋은 가격대에 먹는 호사를 누리기도 하고 연희동의 엽서도서관과 소품샵을 누비기도 했다.


내가 고른 그린치 스웨터. 분당 CYC에서 겟!



집 근처 도서관에서 꾸준히도 책을 빌려보았다. 

끝까지 다 읽은 것도 있고 몇 번 뒤적이다 끝내 다 못 보고 기한이 다되어 반납한 책들도 있다. 

도서관을 꾸준히 간다는 그 행위 자체가 아주 오래된 습관이자, 나에겐 그래도 백수지만 생산성 있는 일을 하는 것 같은 상징성(?)이 있어 아직도 열심히 다니고 있다. 

무엇보다 남편이 당뇨 진단을 받자마자 바로 도서관으로 뛰어가 당뇨와 건강 관련된 서적들부터 쓸어 담듯 빌려왔다. 진짜 쌓아두고 하나부터 끝까지 다 읽어내려고 했다. 읽다 보니 점점 중복되는 내용들이 눈에 보여 그런 부분들은 건너뛰긴 했다. 

그 외 제일 유익했던(?) 책은 송길영 선생님의 '그냥 하지 말라'와 제일 위안을 받았던 책은 귀찮 작가님의 '귀찮지만 매일 씁니다'였고, 나름의 기대를 하고 엊그제 빌린 책들은 창고의 키보드를 다시 세팅할 수 있게 힘을 실어준 '박터틀의 재즈피아노 독학 가이드북'과 인스타툰에서 두세 번 보고 바로 예약하고 찾아온 '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이다. 


12월에 들어서고 나서는 이틀에 한번 꼴로 저녁 6시경에 아파트 단지 내 헬스장을 갔다.

인바디를 해보니 근육을 6kg나 올려야 한다는 결과가 나와서 암담했던 것이다.

사이클 2-30분 타고, 천국의 계단과 러닝머신도 인터벌로 뛰어주고, 아령운동과 웨이트도 가장 가벼운 무게로 조금씩 시도했었다. 근데 크리스마스 즈음부터 게을러져서 안 갔더니 그새 허벅지가 말랑말랑 해졌다. 

오늘 저녁부터 다시 가보도록 해야겠다..


운동할 때 정말 의욕 솟는 듣기 좋은 노래






두서없이 적어 내려가긴 했는데, 사실 계속 몸을 움직여가며 평이한 하루를 살아내려 노력했지만 무기력한 순간들이 너무 많았다.

백수인데, 시간이 이렇게나 많고 여유도 되면서 아무것도 못해?

움직이고 있는데도 움직일 수 없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고, 또 너무 하찮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이 계속 났다.

마룻바닥에 주저 않아 울고, 침대에 누운 채로 울고, 샤워하면서도 울었다.


나 스스로가 세상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과거에 했던 모든 결정과 선택들이 다 잘못된 것 같았고, 대처를 제대로 못해 이 지경까지 몰고 온 내가 너무 병신 같았고, 또 시간이 꽤나 지났는데도 이런 감정의 기복들 조차 극복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울고만 있는 내가 끝없이 멍청하게만 느껴졌다. 


백수라서 시간도 많아, 그동안 모아둔 돈도 있어 쉬는 동안 주머니 사정도 괜찮고, 어디라도 마음 막 먹으면 갈 수 있는 내 소유의 차도 있고, 지금 당장 짐 빼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집도 있어 아무 걱정 할 필요도 없는데. 심지어 주변에 나를 열렬히 응원해 주는 친구들, 나를 이해해 주려고 노력하는 든든한 남편도 있는데. 모든 게 다 넘쳐나고 이미 많은 걸 소유하고 누리고 있어 행복에 겨워도 모자랄 판인데. 


왜 아무것도 못하니?

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니?


... 힘이 없어. 할 수가 없어.


항상 돌아오는 건 한없이 초라한 내 대답이었다. 

그렇게 하루에도 수십 번씩, 힘없는 나를 스스로 괴롭히는 질문들과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번아웃이었던 것 같다. 

1년이 넘게 매일매일 '나'라는 사람을 죽여가며 납작 엎드려 시부모님과 함께 일하고 저녁을 같이 먹고 주말이나 공휴일에도 봐야 했던 생활은 내가 이제까지 했던 어떠한 직장생활보다도 더 힘들고 어려웠으며 굴욕적이었다. 내가 원하지 않았고 내 맘에 들지 않아도 그저 나에게 베풀어주시는 모든 것들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 마음을 헤아리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매 순간을 꾹 참고 또 참았다, 나만 참으면 되는 줄 알고.


그렇게 퇴사 후 모든 커넥션을 차단하듯 거리를 두고 살면서 이제 좋아질 일만 남았어! 했는데, 후유증이 스멀스멀 하나 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내가 무시했던 내 마음의 소리들이 그제서야 하나씩 소리치듯 울려 퍼졌다.


너무 억울해!! 

왜 아들이 잘못한 걸 가지고 나한테 화풀이하시는 거지?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해? 

내가 얼마나 더 잘해드려야 해?

내가 하녀야? 내가 종이야? 


이런 외침들에 사로잡혀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두어 달을 울음이 나오면 터져 나오는 대로, 부지런히 살았다.



제가 그렇게 우스우세요?



그렇게 벌써 크리스마스도 지난 12월 27일이다.

남편과 친한 친구는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상담을 받기를 권하였고, 혹은 새로운 일을 구해서 바쁘게 살라는 조언을 듣기도 했으며, 종종 올렸던 인스타툰이 너무 재밌으니 다른 생각하지말고 어서 바삐 그려내라는 독촉(?)을 듣기도 했다. 

사실 모두가 나를 걱정하고 또 도움이 되고 싶어 해주는 말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힘이 없었다. 

잠시 무기력하게 누워 유튜브 숏츠를 의미 없이 보다가 갑자기 또 일어나 부지런히 빵을 굽고 집안일을 해내고 가능한 조금이라도 인쇄된 활자를 눈과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는 하루를 보냈다. 


진지하게 상담을 받을까 하여 몇 번 시도해 보았지만 솔루션은 이미 다 아는 내용이었다. 아마 나와 잘 맞는 좋은 선생님을 찾지 못해서 일수도 있고, 내가 끈기가 없어서일 수도 있다. 상담비로 차라리(?) 내가 사고 싶었던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남편한테 받기로 하였는데, 막상 써보니 갑자기 세상 모든 음악이 다 감동으로 다가와 너무 감격스러운 나머지 눈물이 차오를 지경이었다. 


이 큰 집에 나 혼자만의 공간이 없어 답답했었는데, 노이즈캔슬링 기능을 켰더니 나 혼자 오롯이 있는 느낌인 데다 음악에 따라선 내가 마치 콘서트장에 앉아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근 이틀 동안 히사이시 조가 지휘하면서 중간중간 피아노 연주까지 직접 해내는 토토로 오케스트라 버전을 고음질로 들었다. 그렇게 울고불고해도 마음이 안풀렸는데 갑자기 양쪽 청력만으로 힐링이란걸 느꼈다. (힐링 참 간단하고 쉬웠네...?)


지금도 황홀하게 고막을 녹여내듯 고음질 음원을 들으면서 브런치에 장문의 글을 쭉 써내려 와 보았다.

이렇게 타자를 쳐가면서 여기에 나의 묵혀왔던 생각들을 토해내고 부정적인 감정들을 배설하고 있다.

이 또한 하나의 치유의 과정이라 생각한다.


친구가 해준 말로 급 마무리 지어야겠다. (웃음)


"나 요즘 일상이 무너진 것 같아. 2023년은 망했어. 근데 생각해 보니 어차피 망한 거, 올해 며칠 안 남았는데 이대로 쭉 그냥 보내려고! 대신 2024년부터 다시 잘해나가면 되니까!"


(맞는 말이야!!)



2024년아!! 어서 와라!!! 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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