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겠다 30대의 우리 엄마
치매가 온 친할머니와 기억안날때 부터 같이 살았다는건 우리엄마가 시어머니를 계속 모시고 살고 있다는 의미.어릴때는 시어머니가 뭔지 그냥 다같은 가족아닌가 싶었다.그럴리가 그당시 시어머니들의 꼬장꼬장함은 아마 날이새도록 설명 해야 할 것이다.우리할머니는 아빠한테는 불량엄마 엄마한테는 나쁜 시어머니였다.엄마가언니를 배고 한창 힘들었을 당시 할머니는 이단종교에 빠졌고, 집에 사람들을 데리고와서 하루종일 예배를 하고 담배를 피고 먹을 것을 먹고 했다. 밥냄새만 맡아도 힘겨웠던 엄마는 참고 또 참았다고 한다.
내가 조금 더 컷을때 유치원에서 엄마와 함께하는 체험 학습날이 많았던걸로 기억난다. 그때는 진짜 그런게 왜이렇게 많았는지.그런 체험 학습에는 몇번 참석한 적이 없었다.그때 마다 엄마는 엄마의 상황을 설명 했던거 같다. 그리고 사랑한다며 주말에 더 즐겁게 놀아주겠노라고 약속했었다. 나는 엄마에게 서운하기보다 상황을 이해했던거 같다. 엄마를 너무 좋아하니까 엄마의 기분을 상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 어린나이에. 내가 철이 일찍 들었다기보다 생각해보면 엄마가 충분한 사랑을 항상 줬기때문에 엄마라는 존재를 믿고 이해 할 수 있었던거 같다.초등학교때 참관수업때도 엄마가 잠시 왔다 갔었는데 이제는 내가 온전히 이해한다고 생각했는지 십분 보다가 엄마는 가버렸었다. 그때도 설명을 간단히 해줬었는데 그때도 난 초딩의 패기로 괜찮다 엄마가 있으나 없으나 난 잘한다고 잘난척을 했었다.돌아가는 엄마마음은 어땠을까. 지금은 생각해본다.반차휴가를 냈었을텐데 계약직에게 그런게 있었을까 지금은 생각해 본다.
다시 할머니의 이야기를 하자면 할머니가 우리식구의 식사도 담당하고 계셨는데 아빠가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날의 밥솥은 항상 비어있었다. 엄마는 늦은밤 돌아와서 라면을 끓여먹거나 빵을 사오거나 했었다. 그때는 엄마가 빵이랑 라면을 좋아하는가보다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바쁘고 힘들게 일하고 들어와 밥을 해먹을 여유가 없었던것이고 아들밥은 챙길수 있어도 며느리밥은 챙길 마음이 없는 할머니의 얄미운 행동들 때문 이었다.
어렸을때는 사랑받기위해 이해하는 척을 했던거 같은데 지금은 온몸으로 깊게 이해를 할수있다.내가 일을 하고있으니까. 집안사정 이야기하면서 휴가를 얻는거는 너무 힘들고,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워킹맘은 여전히 지금시대에도 회사에서 눈치밥을 먹고 있다는걸 안다. 일을 하는 서른초반의 나이가 된 나는 서른초반의 엄마의 힘듬이 가엽고 감사하다. 엄마는 또 반대로 내가 안타깝고 아까울것임을 안다.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연민이 진정한 유대를 만들지만 때로는 어누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상처는 또 다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덮어놓고 아물기를 기다린다.
난 진정으로 사랑한다 엄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