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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빌런 미란다는 멋진 리더였다

악마는 왜 프라다를 입을까?

by 나저씨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귀멸의 칼날 버전(챗지피티를 활용하여 이미지 생성)

오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를 다시 봤다. 오랜만에 보는 영화인데, 보는 내내 생각이 많아져서 이렇게 글로 남겨본다. 2006년,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땐 주인공 앤디(앤 해서웨이)가 낯선 세계에서 좌충우돌하는 가벼운 코미디 정도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를 괴롭히는 미란다(메릴 스트립)의 악역 연기가 너무 찰떡같아서, 영화 내내 '저 사람 좀 혼내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영화가 나온 지 19년이 지나 다시 보니, 예전엔 보이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첫 번째, 미란다는 진짜 리더였다.


내가 그토록 미워했던 악역 미란다. 사실 그녀는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리더였다. 물론 영화에서 보여준 행동 중엔 여전히 잘못된 부분이 있고, 화나는 장면도 있다. 하지만 업무적인 측면만 놓고 보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무작정 앤디에게 화를 내고 괴롭힌다고 생각했는데, 천만에. 미란다는 일정이 바뀌면 즉시 알렸고, 원하는 건 명확하게 지시했다. 물론 그 업무가 부당할 수도, 복수심에서 나온 요청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시는 명확했고, 결과에 대한 상벌도 확실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란다는 예측 가능한 리더였다. 취향이 독특하고 까다로웠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호불호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녀가 온다는 걸 알면 그에 맞춰 준비했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미란다의 가장 큰 장점이다. 나도 회사 생활을 20년 가까이했지만, 예측 가능한 상관을 만난적은 손에 꼽는다. 언제나 기분에 따라 결정이 바뀌고,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하는 상관들. 그런 사람들 밑에서 지쳐 있던 나에게, 미란다 같은 리더는 오히려 내가 바라던 상관에 가까웠다. 나 역시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려고 늘 노력하고 있다.


두 번째, 미란다는 상대 수준에 맞춰 대응했다.


신입이고 패션에 무지했던 앤디가, 미란다와 직원들이 비슷해 보이는 벨트 두 개를 두고 고민할 때 코웃음 쳤던 장면. 이때 난 미란다가 불같이 화내며 앤디를 쫓아내지 않은 걸 인상 깊게 봤다. 미란다는 앤디의 무의식적인 무시에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패션과 색감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하면서, 결국 앤디가 입고 있는 촌스러워 보이는 옷조차 지금 코웃음 친 바로 그 사람들의 손에서 나왔다는 걸 깨닫게 해 줬다. 이 장면에서 난 미란다가 정말 멋진 리더라고 느꼈다. 자신의 일에 대한 자긍심도 높지만, 상대의 수준에 따라 세세하게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는 모습. 내가 다니던 회사에선, 신입 때 실수하면 그 실수에 대해 왜 틀렸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사고를 치면 그 일에서 제외되고, 사람들은 날 투명인간 취급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비슷한 상황에서 또 사고를 치고, 점점 무능한 인간으로 낙인찍혔던 기억이 난다. 내가 생각하는 리더의 자질은 업무 능력이 아니다. 업무 능력은 기본값이다. 리더라면 당연히 일을 잘해야 한다. 그 이상으로 중요한 건 부하 직원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미란다는 그런 리더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세 번째, 미란다는 분업과 권한 위임이 확실했다.


자신이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명확히 알았고, 잘하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 못하는 부분은 더 잘하는 사람에게 권한을 위임했다. 이것 역시 현실에선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내가 경험한 회사 생활에서 업무 위임은 있어도 권한은 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책임과 의무는 있는데 권한은 없이 일하는 거다. 그런 경험을 했던 나에게 미란다는 정말 함께 일해보고 싶은 리더로 보였다. 물론 일하는 동안 힘들고 자존심 상하는 일도 겪을 거다. 하지만 미란다와 일하면 내 커리어가 비약적으로 성장할 거란 확신이 있으니, 그 정도 어려움은 견뎌낼 것 같다. 영화는 이 부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나이젤(스탠리 투치)이 앤디에게 하는 말에서다. 미란다에게 무안을 당한 앤디가 자존심 상해서 나이젤을 찾아가 하소연한다. 아마 공감을 바랐을 거다. 하지만 나이젤은 냉정했고, 동정을 주지 않았다. 대신 신랄하지만 애정이 묻어나는 충고를 해줬다.

"솔직히 자기가 뭘 노력했는데? 징징대기만 하잖아. 남들은 죽는시늉이라도 하는데 자기는 그냥 스쳐가는 자리잖아. 그러면서 미란다가 예뻐해 주길 바라? … 꿈 깨, 아가씨."


아마 미란다가 하고 싶은 말을 나이젤이 대신 앤디에게 한 게 아닐까 싶었다. 사실 내가 상관이었다면 앤디를 바로 해고시켰을 텐데, 미란다는 그녀가 깨닫고 변할 기회를 줬다. 그걸 보면서 '이 사람은 진짜 일을 사랑하고, 감정에 휘둘려 업무를 하는 사람이 아니구나' 싶었다. 마음속에서 존경심까지 생겼다.


그와 동시에, 앤디의 친구들에게 실망했다.


앤디가 힘들 때는 그렇게 위로해 주던 친구들이, 앤디가 성공하고 바빠지니 "너 변했어"라며 실망하는 걸 보고 '이 사람들이 진짜 친구인가?' 싶었다. 내가 보기에 앤디의 친구들은 진심으로 그녀의 성공을 기뻐하지 않았다. 변화를 거부하고 부정적인 영향만 줬다. 앤디가 바빠지니까 시샘하고, 변했다며 비판하고, 성공에 악담을 퍼부었다. 비싼 가방 받을 땐 세상 둘도 없는 친구처럼 굴더니, 조금 수틀리니 "너는 변했어"라며 등 돌리는 모습이 화가 났다. 내 눈엔 앤디의 친구들(남자친구 포함)이 그저 앤디와 비교해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기 위해 친구 행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앤디가 미란다를 포기하고 친구들에게 돌아가는 걸 보고 이해할 수 없었다. 2006년에 이 영화를 봤을 땐 이 결말이 해피엔딩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2025년에 다시 보니 배드엔딩이었다. 앤디는 자신의 행복에 관심도 없는 친구들을 위해 자기 미래를 포기한 거니까.


그리고 마지막, 미란다의 멋진 리더십이 다시 한번 드러난다.


앤디가 새 일자리 인터뷰를 할 때, 레퍼런스 확인을 위해 앤디가 지원한 회사에서 미란다에게 연락했다. 내가 미란다였으면 무책임하게 회사를 그만둔 앤디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말했을 것 같은데, 미란다는 달랐다. 물론 부정적인 이야기도 했지만,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그녀를 고용하지 않는다면 너는 바보다.(If you don't hire her, you're an idiot.)"


멋지게 앤디의 자질을 평가하고 인정해 준 거다. 앤디가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게 해 준 사람은 결국 미란다였다. 솔직히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처음 봤을 땐 주인공이 앤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본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미란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만큼 내가 많은 걸 경험하고 배운 후에 보니, 그때는 보지 못했던 부분이 하나씩 보였다. 왠지 즐거웠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이 영화를 예전에 보셨던 분들이라면, 다시 한번 보시길 추천한다. 이전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거다.


마지막으로, 영화 마지막에 미란다가 한 대사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Drive(운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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