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의 사랑은 강력했다.
물론 내가 설거지를 바로 하지 않고 칼을 물에 담궈놓았던 탓도 있겠으나,
고구마를 자르다가 칼이 부러지다니.
당황스럽다기 보다는 이 상황이 웃겨서 피식 웃음이 먼저 나왔다.
겨우 내 우리집 부엌 서늘한 곳에서 겨우내 견디던 고구마들은,
나의 정성스런 방치에도 불구하고 군데군데 못먹는 구석이 생겨버렸고,
나는 사전투표로 완성된 완전한 휴일에 고구마를 손질하던 중이었다.
낮에 내가 좋아하는 카페에 가 커피도 사왔고, 점심도 맛있게 먹었겠다.
미뤄놓은 설거지를 해치우고 고구마를 손질 해 부엌에 남은 자리를 더 늘릴 셈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고구마를 자르던 그때, 칼이 손잡이에서 쑤욱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고구마는 마저 잘라야 했기 때문에 손잡이 빠진 칼을 부여잡고 고구마 손질을 마쳤다.
이렇게 손질한 고구마는 에어프라이어에서 180도로 15분.
열심히 돌려주면 진짜 맛없게 생긴 나무토막같은 군고구마가 완성된다.
하지만 먹어보면 겉바속촉 엄청 맛있는 고구마가 된다는 것은 먹어본 사람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사실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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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우리 집에 날을 잡아 손질해야 할 정도로 고구마가 많아지게 된 것은
셋째 이모가 취미삼아 시작한 고구마 농사 때문이다.
퇴직하고 취미로 밭에 심기 시작하셨는데 덕분에 일가친척에겐 매년 고구마 한상자씩이 집으로 배달된다.
이게 벌써 두 번째로 받은 고구마인데,
문제는 한 번 보내실 때마다 20kg는 넘게 보내주시는 것 같다는 것이다.
확실히 전주사람들이라 손이 크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올해도 10kg만 보내달라고 한 게 무색하게 커다란 상자 가득 고구마를 보내주셨다.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조금 보냈으니까 맛이나 봐."
셨다. 역시 손이 크시다.
혼자사는 살림에 고구마 한상자를 다 먹기까지 두 계절이 걸려도 모자란 일이라서,
결국 고구마는 삶아서 냉동실에 넣는다.
그리고는 아침에 바쁠 때 꺼내 두유를 넣고 고구마 라떼를 만들어 식사 대용으로 먹는다.
아마 내가 열심히 이 고구마를 다 먹을 때 쯤이면 이모는 올해도 고구마를 보내주실 것이다.
오늘 칼이 부러진 덕분에 한 번 웃고, 오랜만에 이모에게 카톡을 보냈다.
노릇노릇 구워진 것 같은 고구마 사진에
이모는 고구마가 멋있다고 하셨다.
딱히 할 말은 많지 않지만 서로의 안녕을 비는 그럭저럭 가까운 사이가
난 참 사이가 좋다고 생각한다.
(서로 웬수같이 여기는 친척들을 생각하면 특히나 더 그렇다.)
이모와 엄청나게 자주 연락하거나 눈물나게 살갑지도 않은 조카이건만.
이모는 올해도 단순히 손이 크다고 하긴 뭣한,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타지 생활을 하는 조카에 대한 염려가 꾹꾹 눌러 담긴,
그런 한 상자를 보내주실 것이다.
그런 염려와 사랑을 먹고 자란 고구마라서 그런지,
우리 집에선 고구마가 최강의 생명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