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4. 첫째 날. 인천공항 -(비행기)- 마쓰야마 -(버스)- 고치시
여행 첫날은 항상 비슷한 기분이다. 전날까지 막연한 기대감, 흥분이 있다가도, 막상 떠나는 날이 되면 모든 것이 잘못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장 큰 실책을 가장 중요한 시점에 저지르는 것 같고, 실제로도 안좋은 날에나 가끔 있을법한 일이 생긴다. 오늘은 누군가 아침부터 엉뚱한 자료를 탁 보내와서 어제까지 부지런하게 마무리 해 둔 서류를 손보았는데, 한참 공을 들이고 나니 원래대로 하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계속 지키고 싶은 일상도 있었다.
비행기가 뜨면 그래도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기분이고, 반은 체념한다. 땅에서 올라갔는데 어쩌냐는 마음이다. 마치 등떠밀린 것처럼 좋든 싫든 이제 여행을 할 수밖에 없달까. 참 이상한 것은, 여행을 마음먹기까지는 여러 선택지와 갈등요인을 제치고 가까스로 결정한 것인데, 막상 닥쳐와서는 '가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마음만 허락하고 싶다. 일상으로부터 도망친다는 비판에 대해 변명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런 감정은 혼자 떠나는 여행에서만 느끼고 동행과 함께하는 여행은 그렇지 않다. 동행과 대화하다보면 이미 여행은 시작되어 있다. 요즘은 동행이 있는 여행도 좋다.
1. 25. 둘째 날. 고치시 - (버스 / 걷기 / 택시) - 34번 찰소 타네마지 - 35번 찰소 기요타지 - 도사시 우사초류(삼양장)
고치시 히라마야바시 근처에서 버스를 제대로 탄 것 같기는 한데, 엉뚱한 곳에서 내리게 되었다. 예전에 타보았던 버스지만, 노선이 바뀌었거나 겨울에는 단축 운영을 하나보다. 내린 곳은 어느 주택가 한가운데. 뭐 이런데까지 버스가 들어오나 싶었는데, 거기가 종점이었고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 나에게 운전자는 몇번이나 스미마셍을 외쳤다. 34번 찰소 타네마지까지 어떻게 가냐고 물으니 그 운전사는 한참 생각하다가 반대편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고치시로 돌아가라고 한다. 어이가 없어 너털웃음을 지으며 걸어가겠다고 하니 점잖은 그의 표정에 놀라움이 번진다. 일본사람들은 대부분 무표정한데, 뭔가 놀라움을 표할 때 약간 과장하는 배우처럼 얼굴빛이 바뀌고 생기가 돈다. 그걸 지켜보는 것은 꽤 재밌다.
주택만 죽 이어진 마을에서 빨래 너는 아낙들로부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받으며 빠져나왔고, 삼십분 정도 외딴 길을 걷다보니 원래 순례길과 만날 수 있었다. 32번 찰소 젠지부지에서 33번 찰소 세케이지까지 가는 길목이었다. 예전에 걸었던 길이어서 약간 기억이 난다. 이대로 10km 이상 가고 그 사이에 배를 한번 타야 이번 여행의 시작점 타네마지가 나올 것이다.
유쾌한 길이라고는 하기 어렵지만 조용한 민가들 사이의 골목길을 걷자 마음이 차분해진다. 우체국에서 국제엽서용 우표도 몇 장 산다. 좀 더 걷다보면 기가막힌 도리야끼집이 하나 있다. 모치쿠라조 본점(もち蔵家 本店). 1년 반이 지났지만 가게 구조, 도리야끼가 늘어선 진열대, 기웃거리는 사람들 모습, 성실한 예술가 느낌이 나는 바깥주인 모두 그대로이고, 접객하는 안주인만 내 기억보다 약간 더 나이가 들어보이긴 하나 그녀의 친절함이나 따뜻함은 여전하다. 그녀는 동네 사람에게 짧게 안부를 묻고, 필요한만큼 도리야끼를 포장하고, 높고 얇은 목소리로 감사한다고 말한다. 140엔짜리 간식 두개를 팔면서 말이다. 아마 도리야끼가 모두 떨어질 때쯤은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도 은근히 웃어주면서 "꼬노마에"(요전에) 라고 아는 척을 해주었고, 이미 두시간 가까이 여정을 허비한 나에게 이 인사는 꽤나 큰 위로가 되었다. 잘못 들어선 마을에서 '타다이마'(다녀왔어요) 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골중에서도 시골인 시코쿠 남단에서 오래된 가옥을 개조해 넓은 작업실, 좁은 판매소를 만들고, 전통의상을 입고 전통과자를 빚고, 1년 반 전에 잠깐 들른 이방인의 얼굴을 기억할 정도로 성의껏 손님을 맞는다. 잘은 모르지만 부부 모두 도시 출신같고, 폐쇄적인 시골사람들 틈에서 안먹어도 그만인 과자를 팔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지만, 좋은 인상과 웃음과 단맛으로 그들 나름대로 죽기살기 노력해왔을 것이고, 이제는 이 동네의 명물이 된 것이다.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찌푸린 채 일상을 흘려보내고 있는 삶과 비교하면, 누구의 삶이 더 흥미로운가 묻게 된다.
점심은 배를 기다리면서 도리야끼로 때웠다.
사실 배를 탄 뒤에는 바로 택시를 타고 원래 출발지로 삼았던 타네마지로 가면 되지만, 그 전에 보고 싶은 양조장이 하나 있어서 일부러 좀 걷는다. 스이게이. 이런 촌구석에서 꽤나 근사한 술을 빚고 있다. 예전 여행때 시음을 많이 해봤고, 세 병이나 샀다가 가방 무게를 줄이기 위해 한 병을 그날, 한 병은 그 다음날 다 마셔버렸다. 언젠가 고치시 술집에서 혹시 스이게이있냐고 묻자, 점원은 없는 주제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거 좋은 술이라고 참견했다. 진짜 그렇다.
택시를 타고 타네마지로 갔고, 여기서부터 35번 찰소 기요타지를 거쳐 도사시 우사초류에 있는 온천 숙소 삼양장까지 제법 힘들게 걷는다. 5시가 넘어서는 무거워진 발을 제대로 옮기기도 어렵다. 그래도 막바지 산길과 그곳에서 바라본 항구 모습이 오늘 과다하게 길어진 여정이 무가치한 것은 아니라고 느끼게 해준다.
이곳 삼양장의 넓직한 3인실 숙소를 1인값(약 1만 엔) 내고 쓰려니 약간 미안하긴 하지만, 이조차도 약간 비싼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인상적인 것은, 방까지 안내해준 소년 혹은 동자 혹은 청년의 모습. 스무살이라고 해도 열다섯이라고 해도 스물다섯이라고 해도 그런대로 맞아떨어질 것 같지만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고, 그 시기에 했어야 하는 것을 하지 못했거나 겪지 않았어야 할 것을 겪은 것 같은 얼굴. 순박하게도, 교활하게도 보인다. 느긋하기만 할 것 같은 시골마을이지만, 가난한 삶은 어디서나 고된 것이다. 물론 내멋대로 상상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