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코쿠 오헨로 #2-2

by 정호성

1. 26. 셋째 날. 도사시 우사초류(삼양장) - 36번 찰소 소류지 - 스사키 시마분코(히카리 민박)


삼양장은 꽤 큰 온천숙소인데도, 나 혼자 아침식사를 한다. 어제 저녁식사도 미리 주문해 놓은 자리는 나 하나였고, 온천하러 왔다가 식사하는 테이블 두엇이 전부였다. 텅 빈 큰 호텔에 나만 있으면 기분이 좋다. 주인이야 질색하겠지만 낸 돈보다 더 대접받는 기분이 든다. 한번에 네다섯 테이블을 상대해야 하는 종업원은 나만 시중들고, 30인분을 만들 수 있는 요리사는 내 음식만 만든다. 온천수가 가득한 노천탕에도 혼자 몸을 담근다. 수지맞는 거래를 한 것 같다.


아침에 36번찰소 소류지에서 납경을 하고, 해안을 따라 걷다가 터널도 서너개 지났다. 길거리 무인판매대에서 200엔을 주고 큼지막한 귤 열개 한봉지를 샀더니, 너무 무겁다. 무게를 줄이려고 한번에 새 개를 먹었더니 조금 걷다가 오줌보가 터질 것 같았다. 화장실을 찾느라 오줌을 한참 참았다가 누었더니 피로감이 몰려왔다. 앉아서 쉬며 다시 귤을 까먹었다. 내가 지금 뭐하는건가 생각을 하면서, 하나 더 먹었다. 조금 뒤에 또 오줌을 누었다.


오후에 스사키 시내에 있는 쇼핑몰에서 선크림, 비니, 손수건, 반창고, 손톱깎이 등을 샀다. 미리 준비했어야 하는 것들인데 빠트린 것이다. 신발도 너무 딱딱했다. 이번 여행은 정말 아무런 준비도 안했다. 떠나는 것이 꺼려져서 준비를 미뤘던 것도 있다. 쇼핑몰 안을 둘러보다 보니, 직원들 표정에서 현실감이 부쩍 들었다. 다들 피곤하고 약간은 신경이 곤두서 있다. 토요일 오후니 많은 사람들이 곧 몰려 올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시골길에서 마주치는 한가한 사람의 표정일 리가 없다. 대낮부터 떠도는 내 표정은 어떻게 보일까.


오늘 민박 히카리에서는 인상좋은 할아버지가 반겨주었다. 영어도 곧잘하고 목소리에 힘이 넘치는 양반이다. 전화통화 느낌으로는 안경을 쓴 중년일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60세를 훌쩍 넘겨 보였고 머리도 많이 벗겨져 있다. 식당 앞 작은방은 사무실 겸용인데, 여기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는 할머니는 80세 중반은 되어 보였다. 그의 어머니일까. 딸 둘도 같이 일했다. 둘이 닮았는데, 언니는 살집이 있고 거세게 생긴 반면, 동생은 날씬하고 수줍게 생겼다. 동생이 나에게 스튜를 가져다 주면서 "오까와리 아리마스요"(한그릇 더 드셔도 되요)라고 말하는게, 어찌나 부끄럽게 전하던지 마음을 고백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 둘이 너무 비슷하게 화장을 해서, 오직 그 화장때문에 실감나는 1인 2역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낡은 건물, 여든 노모, 장성한 딸 둘. 부인이나 사위는 보이지 않았다. 주인 양반은 젊은 시절부터 민박을 친 것 같다. 목수일도 하고 전자제품도 고치고 방도 쓸고 손님들과 잡담도 하면서 평생을 보내온 것이다. 이제는 쉬고 싶어할 나이같은데 두 딸이 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할 것 같다.여자들만으로는 쉽지 않겠지. 아마 자기 대에서 이 일을 그만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고, 장기적으로 계속하기에 시설이 너무 오래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편으로는 삐걱거리는 마루와 낡은 탈수기와 브라운관 티비를 가지고도 삼대를 부양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그가 말하는 방식과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진다.


내가 일곱시 반 너머 세탁물을 걷어오면서 사무실 문을 열고 맥주를 찾았더니, 모의라도 하려는듯 얼른 문을 닫으라고 했다. 그리고 냉장고를 주섬주섬 뒤지더니, 633미리짜리 기린 맥주 한병을 내주었다. 같이 준 컵도 무겁다. 손님용이 아니고 자기가 마시려고 차갑게 해 둔 것이다. 밖에 맥주병이 적잖게 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대부분 그가 마신 것일까. 이 방에 배어있는 짙은 담배연기와 탁자 위 반 남아있는 맥주병을 보노라니, 그가 낮에는 힘껏 손님을 맞이하고, 밤에는 담배와 술로 버텨오는 생활을 꽤 오래 해 왔을 것이 눈에 선했다. 난 앞으로도 그가 제법 오래 힘있는 목소리를 유지하기 바랐다. 그 딸들이 어서 소같은 사위를 데려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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