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코쿠 오헨로 #2-3

by 정호성

1. 27. 넷째 날. 스사키 시마분코(히카리 민박) - 37번 찰소 이와모토지 - 시마모토(미마미야 료칸)


서서히 몸 여기저기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어젯밤에는 종아리에 경련이 일었고, 왼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더니, 오늘은 왼쪽 발목이 아프다. 하루종일 아스팔트를 걷자니 내 다리들도 꽤 고달플 것이다. 경사가 있어도 산길, 흙길이 좋은데, 오늘은 약 30분정도만 흙길이었고, 계속 차로 위다.


오전에는 제법 긴 터널을 지난다. 약 10분정도 걸은 것 같으니 700미터는 족히 될 것 같다. 차를 마주보고 걸었고, 차가 가까워지면 벽에 붙어서 멈춘다. 지나치게 조심하는 감이 있지만, 만약 운전자의 실력이 서툴거나,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다가 핸들을 잠시 느슨하게 잡은 것이라면 이쪽이 잘 피해야 한다. 아무도 보지 않는 터널 한가운데서 사람을 벽에 짓이기는 기분을 맛보고 싶은 운전자가 있다면,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터널 벽에 내 살점이 흩어질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다면 악행을 안 할 이유가 있는가. 처벌이 없다는 것이 보장되어도, 앞으로 만날일 없는 이방인을 내버려 두어야 하는가. 사후처벌이 없는데도 인간은 선해야 하는가. 어둡고 긴 터널에서 쌩쌩 달리는 차들과 불과 사오십센티미터 간격만 두고 걷자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괴롭힐 수 있다는 바로 그 이유때문에 곤충, 동물, 사람을 괴롭히는 작자들이 간혹 있지 않은가. 그들이 운전대를 잡고 내 옆을 달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다행히 그런 운전자를 만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면서 무사히 터널을 빠져나온다.


점심은 돈타로 나나코점에서 '매운 김치 미소 돈카츠 라멘'을 먹었다. 꽤나 길면서도 바로 이해가 되는 이름이다. 김치가 이 집의 장점이라는데, 사실 속이 제대로 안 된 분식집 김치 맛이다. 30분 정도 순번을 기다려서 5분만에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섰는데, 매운 김치를 우습게 본 탓일까 얼마 안지나 배가 몹시 아파왔고, 위태위태한 순간에 레스토랑 코스모스가 나타나서 다행히 문명인으로서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식당은 적어도 칠순은 되어보이는 노파 여주인이 혼자 운영하고 있었다. 서비스 스테이크를 1300엔에 판다고 큼지막한 배너를 걸어놓았고, 마라톤 중계를 하는 티비를 큰 소리로 틀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보아하니 스테이크 광고는 유일한 광고판이기에 치우면 허전해서 수년 전부터 내버려 둔 것 같고, 티비 볼륨이 큰 것은 여주인이 가는 귀가 먹어서 인 것 같다. 이 노파는 마라톤은 커녕 운전도 제법 공들여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손님을 위해 틀어놓은 스포츠 채널에 재미없는 마라톤만 두 시간 넘게 방송될 것을 생각하니 약간 서글퍼졌다.


그녀는 나에게 커피와 물 한잔을 가져다주고, 주방으로 돌아가 등받이 없는 의자에 등을 보이고 앉았다. 등이 많이 굽어 있었지만,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이 반평생은 보냈을법한 장소라 그런지 왜소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외롭지 않아 보였다는 것은 아니다. 언제까지 그녀가 화장실 급한 여행객에게 냉수 한잔을 붙여 커피 한잔을 팔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당장 내일 문을 닫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조금 더 걸어가면 로손 편의점에 식당이 잔뜩 몰려있는 미치노에키가 있어서, 장사가 여의치 않아 진 것은 제법 되었을 것이다. 사백엔을 계산하며, 그녀의 말년이 좀 더 식당 여주인다울 수 있길 바랐다.


시마모토에 있는 고민가 카페 '한펜'에서 느긋하게 카페 분위기를 맛보려는 마음에 약간 무리해서 걸었더니 발바닥 물집 안의 물이 오락가락 하는 것이 느껴졌다. 숙소에 와서 보니 항상 생기는 그자리이다. 물집은 이리저리 눌러보고 찔러보기에 꽤 재밌다. 뿌듯한 기분도 약간 든다. 그러나 참고 걸을만한 오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스팔트 바닥과 내 발바닥을 원망하기 마련이다. 걷기 여행에서 물집은 항상 생겼지만 그렇다고 그 고통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루에 사만 걸음이라면 사만 번의 고통이 있고, 처음 이만번 정도는 괜찮았다가 나머지 이만번은 예의 그 찌르는 듯한 통증으로 신경이 곤두선다. 그래도 며칠 지나면 딱딱한 발바닥이 생기고, 마음 한 구석도 단단해지는 기분이기는 하다. 이 여정을 육체적 도전에 대한 응수로 격하시키지 않으려면 적당한 수준으로 몸을 사용하는게 좋다.


오늘 숙소 미마미야 료칸은 옛 민박을 세련되게 리노베이션했고, 방에는 다다미 대신 푹신한 침대와 깨끗한 이불, 욕실에는 작은 병에 담긴 샴푸, 린스, 바디숍도 있다. 저녁식사로 큼지막한 회, 창고나베, 약간의 안주가 딸려나와서 술 몇잔에 배를 채우기에 손색이 없다. 가격은 만 이천 엔 정도인데, 어제 묵었던 민박의 두배이다. 약간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안경 쓴 여주인이 있고, 일하는 직원도 제법 된다. 그 중 하나는 이제 막 고등학교를 마쳤을 법한 소녀인데, 그녀는 직원인지 가족인지 모르겠으나 잔뜩 위축되어 있는 모습이, 사장인지 엄마인지 모를 안주인에게 자주 혼나는 것 같다.


어제 숙소 히카리와 오늘 숙소 미마미야. 어느 쪽이 좋냐면 이제는 후자이다. 육천 엔을 더 지불하고, 더 따뜻한 방, 더 푹신한 잠자리, 더 맛있는 식사를 찾는 것이다. 이 사실이 나를 더 나이들고 덜 모험적으로 만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돈이 더 생기면 포시즌이나 리츠칼튼만 고집하려고 하고, 편하지 않은 여행지는 가려고 하지 않게 되는 것일까. 십수년 전 뉴델리를 여행할때는, 싼 숙소가 모여있는 메인바자르 초입에서 절대 멈출 것 같지 않은 차들에 기가 질리면서도 조금이라도 싼 숙소를 찾으려고 릭샤 매연을 헤집고 다녔고, 그렇게 찾은 온수 나오는 욕실과 막히지 않은 화장실이 붙어 있는 150루피짜리 방은 하나의 승리였다. 고생한 뒤의 뿌듯함, 절약에 대한 자랑, 물가 차이에서 오는 초조함이나 관대함, 나머지 여정과 주머니속의 현금을 비교하면서 오늘 저녁은 꽤 지출했으니 내일은 절약하겠가는 다짐, 이런 것들이 주는 여행의 재미는 앞으로 잃어버리게 되는 것일까. 지금은 여행 중에 돈을 아끼면 뭔가를 성취했다는 느낌이 아니라 약간의 안도만 남는다. 이것이 내 여행 인생을 더 빈곤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것과 되바꿀 만한 어떤 재미가 아직 저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유쾌한 재미를 하나 잃어버린 것이 다일까. 나이를 드는 것이 이런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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