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코쿠 오헨로 #2-5

by 정호성

1. 29. 여섯번째 날. 도사이리노(네스트호텔) - (기차) - 나카무라역 - (기차) - 스쿠모역 - (버스) - 시미즈 - (버스) - 아시즈리 미사키 - 38번 찰소 콩고후쿠지 - 아시즈리 (테르미호텔)


아침에 일어나면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져있기를 바랐지만, 물론 그럴리 없다. 그럴 일이었으면 애초부터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적당한 아침식사를 먹고, 커피 한잔을 더 마시고나니, 아프다는 사실이나 지체된 일정이 별 일 아닌 것 같다. 물론 그럴리 없다. 어려운 휴가를 낸 것이고, 좋지 않은 시기이고, 좋지 않은 나이이다. 이런 휴가가 내 인생에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더 긴 휴가를 가질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지금과 마음도 몸도 시기도 다르다. 한마디로 다시 오지 않는 순간인데, 이를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커피 몇 잔으로 낙관을 살 수 있다면 나는 대단한 낙관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커피가 주는 마음의 위안은 분명 있지만 이는 마지막 모금이 아직 잔 안에 남아있을때까지만이고, 그것이 목구멍으로 사라지면서 낙관의 여운과 씁쓸한 뒷맛만 남기면 나도 모르게 두번째 잔도 마시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진해진 쓴 맛과 묵직해진 머리와 내려앉는 어깨만 느껴진다. 약간만 나이들었지만 지나치게 성숙해버린 소년, 오늘 하루도 아주 나쁘지는 않겠지만(적어도 모닝커피와 공상을 즐긴 날은 아주 나쁜날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멋진 하루를 기대하기에는 이미 어느 정도 세상을 알아버린 소년이 된 느낌이다. 매일 아침 들이킨 커피의 횟수와 양과 색만큼이나, 오늘이 어떻게 될지 확실하다. 결국 이번 여정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아시즈리 미사키까지 버스로 이동하게 되었고, 가는 내내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이곳에 와서 다자이오사무 인간실격을 읽은 탓일까. 어째 내 여행이 실격이 된 기분이다. 걷기위해 왔는데 발 걱정에 일 걱정에 사람 걱정에 마음이 더 무겁다. 발목 통증이 점점 번져나갔고, 역까지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해서 걸어갔을때는 이번 여행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장거리 걷기 여행이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따라붙었다. 저 책에서 요조의 인격이 타인과 사이에 적절한 감정을 형성하는 능력을 결하고 결국 어둡고 추한 면만 파고들어 그것을 자기 비극으로 만들고 있다면, 발이 아프게 된 내 여행은 꼿꼿하게 걷는 능력을 결하고 자꾸 땅에 채이고 현실에 채이고 관계를 걱정하는 마음에 채여 좋은 것을 흘려버리고 안좋은 것만 낚아채는 느낌이다.


아무튼 침울한 마음이 들어서, 그동안 일본에서 꺼려졌던 일을 일부러 해보고 싶었다. 모처럼의 장기 여행이 엉망이 되가고 다자이 오사무까지 읽은 마당에, 파칭코에 가서 돈을 좀 잃어보고 편의점에서 도색잡지를 사보고 싶었다. 딱히 이것을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이 상황에서 나를 더 안좋게 몰아붙이면 약간의 실마리 같은 것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버스도 한번 잘못타서 시간도 붕 떠버리자, 그냥 될대로 되라는 심정도 더해졌다.


그런데 막상 하고 나니 이것도 실격이다. 일단 파칭코는 현금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작은 마을의 파칭코라 그런지 도대체 어떻게 구슬로 바꾸는지 당최 알 수 없었다. 일단 직원이 없다. 혹시나 해서 현금 동전을 기계에 밀어넣었는데 경고메시지가 뜨고 경고음이 제법 크게 들려도 아무도 와보지 않는다. 큰 배낭을 들쳐메고 허옇게 선크림이 들뜬 얼굴로 슬롯머신 옆을 어슬렁거리다가, 너무 시끄럽고 산만하고 담배연기가 지독하게 자욱해서 나와버렸다.


그리고 바로 옆 로손에 갔다. 평소에는 고개도 돌리기 민망한 도색잡지가 늘어서 있는 코너에 서서, 일부러 시간을 들여 얇고 종이질이 좋아보이는 걸로 신중하게 골랐다. 그리고 재빨리 계산하지 않고 일부러 카운터에서 커피를 시켰다. 점원이 계산대 뒤에 있는 커피기계에서 커피를 받아주어야 하기 때문에 내가 카운터에 서 있는 시간은 꽤 길어지게 된다. 그 시간 동안 도색잡지의 구매자로서 서 있고 싶었다. 그 점원은 나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하면서도 한번 쓱 쳐다봤는데, 이 잡지때문인지 내 얼굴에 덕지덕지한 하얀 선크림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막상 잡지를 뜯어보니, 비싼 이유는 dvd가 안에 들어있어서였고, 다른 내용들은 대부분 광고였다. 더욱 못마땅한 것은, 이 쓸모없는 잡지를 호텔에 버리고 가기 꺼려진다는 것이다. 익명으로 살 수는 있었지만, 내 이름으로 체크인한 호텔에 버리지는 못하는 것이다. 나의 타락조차 실격한 느낌이다. 젠장.


아시즈리 미사키 바로 앞에 있는 38번 찰소 콩고후쿠지는 경내도 꽤 넓고 한적하다. 향이 절간 전체에 퍼져있고, 경내 한가운데 큼지막한 연못이 있어서, 이 연못에 비치는 모습과 붕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느긋해진다. 아주 작은 마을이지만 땅끝이니 나름 상징성이 있을 것이나, 허세도 약간 든 것 같다. 경직된 부처상을 쭉 모아둔 작은 돌정원도 있다.


오늘 숙소 호텔 아시즈리 떼르미는 4층 전체를 라이브러리 겸 라운지로 활용하는데, 창 밖으로 태평양이 멀지 않게 보이고, 쇼파가 편하고, 로컬 와인(마루키, 유자와인), 커피도 갖추고 있어서, 구석에 앉아 볕 잘드는 곳을 이따금 바라보며 책을 읽고 있으면 꽤나 호사를 누리는 기분이 든다. 버스 종점에서 전화를 하면 직원이 하얀차를 끌고 데리러 오는데, 이 차를 타고 호텔로 가면 직원 세명이 차에서 내리는 나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며 반겨준다. 노천탕에서 바다가 보이고, 일곱 접시가 넘는 저녁식사를 젊지만 공손하고 나이들었지만 활기찬 종업원들이 시중들고, 고치현 사케 세가지도 천엔, 제법 고소하고 신선한 시미즈 사바(고등어 회)도 천엔에 팔고, 기본메뉴로 나오는 가쓰오타다키도 다른 곳보다 더 신선하고 고소하다. 숙소값도 팔천엔 정도이다. 평소같으면 며칠 더 퍼질러 앉고 싶은 기분이었을텐데, 그래도 빨리 나아서 태평양을 끼고 다시 걷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그리고 오늘 밤 21:30. 호텔 실외 불빛이 탁 어두워진다. 밤하늘 별을 볼 수 있도록 시간을 정해 놓은 것이다. 나는 비니를 깊게 눌러쓰고, 아사히 캔맥주를 하나 들고 고개를 밤하늘로 90도 꺾어서 조금씩 마셔가며, 별을 감상했다. 숱하게 많았고 쏟아질듯 반짝였다. 이런 밤하늘을 보고 있자면, 우주는 인간보다 세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므로 이를 알고 있는 인간이 더 세다고 주장한 파스칼이 얼마나 거만한 놈인지, 이런 공상을 하고 있는 내가 얼마나 할일없는 놈인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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