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코쿠 오헨로 #2-7

by 정호성

1. 31. 여덟번째 날. 아시즈리 미사키 - 오오키노하마(오오키노하마 민박)


오랫만에 걸었다. 아침에 내 걸음이 위태로워 보였는지, 백발이 성성한 퍼시픽호텔 지배인이 나를 뒤쫓아오더니 차로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난 호기롭게 대장부대장부(다이죠브다이죠브)라고 하고, 그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 가급적 절뚝꺼리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30분거리인 아시즈리 미사키에만 다녀올지 아니면 계속 걸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발을 디딜때마다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이 어느 시점에 익숙해 질지 알기 어려웠다. 가까스로 도착한 콩고후쿠지 경내에 앉아 있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비내리는 연못과 법당과 하늘을 바라보니 묘하게 힘이 났고, 비가 내리는 한 걷는게 별 문제 안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가만히 비맞는 것보다 걸으면서 비맞는 것이 덜 처량할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비가 동기를 부여해주었다면 실질적인 도움을 준 것은 두 군데 카페이다. 첫번째 카페 타누키는 구멍가게 하나 없는 작은 마을에, 오두막보다 허름해보이는 간이 건물에, 두명이 다리를 붙이고 앉아야 하고 삼십년은 됨직한 남색 모직쇼파 하나를 내놓고 비맞히고 있었는데, 카페처럼 보이려고 노력한 흔적은 있으나 여전히 정체를 알기 어려운 곳이었다. 내가 다가오자 오히려 그들이 놀란다. 그들이라하면 곧 70이 되는 노인 한명에, 사채꾼이 시코쿠에서 아직 순수함을 잃지 않았을때의 얼굴을 한 그의 청년 친구다. 주인인 노인은 적어도 5년 정도는 머리도 안깎고, 수염도 안깎고, 그리고 손톱도 안깎은것 같았다. 아마 세수도 그 기간만큼 안하지 않았을까 의심되었지만, 비를 아무렇지 않게 맞는 것을 보며 여러 방식의 세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손톱에서 눈을 떼기 힘들었는데, 아 손톱을 내버려두면 이렇게 되는군, 하는 깨달음에약간 흡족스러웠다.


메뉴는 차와 커피. 양쪽 다 겁이 났지만 그래도 커피를 시켰다. 인스탄트 봉지에서 꺼낸 것이라면 저 손톱이 최소한만 닿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가 콩을 갈고 물을 끓이고 한참 준비하더니, 모카포트 한가득 커피를 담아왔다. 가지고 온 컵에는 바닥에 물이 약간 남아있었는데, 이 상황에서 이 물을 버린다는 것 자체가 우습게 여겨졌다. 저 손톱으로 만든 커피를 마신다면 약간 남아있는 설겆이 물 정도는 차라리 해독제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을 버리면 왠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까탈스러운 손님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소심하게 그 잔에 커피를 따라서 조심스레 천천히 마셨다. 독이 퍼지더라도 천천히 퍼지게 하려는 듯이. 그러나 왠걸, 시코쿠에 와서, 아니 최근 내가 기억하고 있는 커피 중 가장 맛있었다. 그 커피맛을 보고 나니, 그는 실패한 히피에서 세상이 알아보지 못한 기인처럼 느껴졌다. 그가 직접 로스팅도 한다고 그의 친구가 추켜세워준다.


커피맛에 취한 내가 실수를 했다. 과하게 칭찬을 한 것이다. 그는 '우레쉬'(기뻐요)를 연발하다가, 같이 내온 러스크도 그 손톱으로 가리키며 자신이 만들었으니 맛보라고 한다. 맛보지 않고 있는 그 이유가 바로 그가 그 손톱으로 직접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때문인데. 나는 러스크를 입에 밀어넣으며 반죽을 그 손으로 했냐는 말을 삼키고 느릿느릿 씹었다. 이렇게 해야 발병도 느려질것처럼. 그런데 이것도 꽤 맛난것 아닌가. 나는 부끄러웠고, 내 칭찬에 부끄러워하는 그의 표정에 더욱 부끄러워졌다.


그는 삼십년 전에 인도에 가서, 리시케쉬보다 북쪽 어디 산속(마날리 근처를 말하는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에서 땅을 파고 들어가 5년 동안 수련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뒤에 고치현으로 돌아와(부처가 뭘 안알려줬나 보다) 산속에 집을 짓고 살다가, 친구가 죽자 그 친구 집에 들어와 살면서 그 옆에서 이 카페를 운영한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받은 엽서, 그 친구가 삼십년 전에 샀을 법한 미니컴포넌트, 손수 만들어서 발밑이 허술한 의자 등을 두고 그는 이제 카페 주인이 된 것이다. 일본 사람은 좀처럼 들르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랏샤이"(어서오세요)라도 외치면서 영업해야 하는거 아니냐니까 으레 그 수줍은 웃음이다. 그는 무로토 미사키에서 아시즈리 미사키까지 이어지는 이곳 고치현의 해안선을 좋아하고, 돈은 별로 없지만 낚시를 할 수 있으니 괜찮다고 한다. 약간 짓궂은 마음으로 고향이 어딘지 물어봤는데 오사카 근처 어디라고 하더니 별로 괘념치 않는 듯하다. 아마 가족도 없고 재산도 없고 젊은 시절 용맹정진한 5년은 이제 잠깐 앉아서 커피 한잔 하는 여행객들에게 들려주는 심심풀이 얘깃거리밖에 안되겠지만, 그의 얼굴 그 어디에도 시름은 없어 보인다. 여행중인 내가 몇 배는 시름을 안고 있는 것 같다. 커피값은 알아서 통에 넣으라기에 천엔을 넣고, 젖은 배낭을 다시 들쳐메고 출발 채비를 하는 나에게, 반야심경 "가테가타 파라가테"를 마치 가톨릭 신부가 축성하는 듯한 포즈로 독경해준다. 공 사상에 심취했다기엔 너무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그의 말년이 어떨지 잠깐 생각해보았다. 이도 빠지고 돌봐주는 사람 없이 병석에 누울수도 있지만, 이를 걱정하는 사람은 정작 그가 아니라 나였다. 그는 지난 수 십년간 그런 불안과 외로움에 맞서왔을 것이고, 지금 그가 웃는 모습을 보면 나름대로 승리했다는 것을 알겠다.


다음 카페는 도사시미즈 이부리에 있는 곳이다. 그 카페는 이름도 모르겠다. 큰 도로가 막 시작되려는 초입의 건물 벽에 커피 그림이 그려져있는 곳인데, 뭐에 흘린 듯이 이곳에 들어왔다. 벌써 몇시간째 비를 맞았고, 발목때문에 쉬고 싶어도 비때문에 계속 걸어야 하는 처지였다. 내가 들어서자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 셋이 대화를 끊어서 정적이 흘렀고, 적어도 삼초 정도 뒤에 그 중 한명인 여주인이 이랏샤이라고 한다. 이런 날, 이런 시간에 누군가 갑자기 들어왔던 적이 거의 없는 카페인 것이다. 그리고 난로를 꺼내와 내 앞에다 틀어주고, 바닥에 내려놓은 내 겉옷을 옷걸이에 걸더니 난로 앞에서 말려준다. 이미 푹 젖었기때문에 소용이 없었지만 그 마음이 고맙다. 비때문에 묵직해진 내 외투를 들어올릴때 무게감때문에 "스고이네"(대단하네)라고 하자, 나는 약간 우쭐해졌다. 그녀는 흰 수건을 가져와서 푹 젖은 내 장갑을 감싸고 손수 짜주었다.


작은 카페였고, 깨끗했고, 잡다한 물건들이 많았지만 잘 정돈되어 있었고, 사케 댓병과 알콜음료가 바 위에 보였고, 창가에는 두벨 등 맥주병으로 장식해놓았고, 마이크도 두어개 있는 것으로 보아 저녁때는 술과 함께 노래를 즐기는 곳 같다. 카페인줄 알았는데 술장사도 하는가 싶은 생각에 여주인을 다시 쳐다보니 이제 막 육십을 넘긴 것 같지만 얼굴 옆모습이 곱고, 동작이 우아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동작에서는 뭔가 단단히 생활에 뿌리박고 있는 현실감이 느껴진다. 카페 타누키 주인의 한없는 자유스러움과는 대비되는 견고함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온다.

커피 힘을 빌어 어렵지 않게 오오키노하마에 도착했다. 발목 통증도 익숙해져간다. 그런데 한국에서 마음이 허해지는 소식을 하나 전해들으니 힘이 빠진다. 나에게 보상도 해주고 마음도 달랠겸, 오늘은 맥주를 두어병 더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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