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7. 분노

by 정호성

오늘 그가 분노하는 것을 보았다. 그답지 않아 보였다. 그는 평소에 말투도 느리고, 점잖고, 의외의 상황에서도 - 가령 보통사람은 화내면서 말할 맥락에서도 - 싱긋 웃는 버릇이 있어서, 나는 그를 잘 모르지만 약간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기름밥을 수십년간 먹어왔고, 항상 허름하게 입고 나타나는 그이지만, 행동거지나 말투는 분명 신사였다.


그가 오늘 P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뭐라 언급했다. 나는 잘못 들은 줄 알고, 네? 네? 몇차례나 되물었지만, 그가 처음 말했던 것을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었다. P를 '참수'하겠다고 한 것이다. 목을 자르겠다, 죽여버리겠다, 이런 표현은 거슬렸나 보다. 나는 그가 신중하게 고른 그 고전적인 표현에 대해 슬며시 웃음이 나오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몇 달 전 대상포진때문에 코에 큰 흉터도 남고, 오늘은 눈의 실핏줄이 터져서 흰자에 새빨간 금이 가서 나타났다. 점점 초라해져가는 그의 행색을 보니 내 기분도 심란해졌다. 그리고 점잖은 성격 밑에서 그동안 켜켜이 쌓여온 그의 분노를 오늘 엿보고 나니, 심연을 들여다 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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