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호성 Sep 06. 2019

9. 6. LJH

올해도 추석을 앞두고 그가 사과를 들고 왔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왔었다. 작년에는 포도를, 재작년에는 기억이 안난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백화점 상품권이 담긴 봉투도 내려놓는다.


올해도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내가 그를 떠올렸던 순간은 없었다. 그가 추석을 앞두고 찾아왔던 때 나는 여느 손님을 맞듯이 그를 맞았을 뿐이었다. 그저 접대용 쇼파에 10분 동안 그와 마주보고 앉아서, 요즘 무슨일 하시냐 물었던 것이 전부였다. 오늘 그가 앉아있는 모습을 보니, 예년에도 내 방 쇼파에 앉을때면 나와 가까운 쪽이 아니라 먼 쪽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기억이 났다.


그동안 감사인사는 충분히 받았다고 오늘 나는 그에게 말했다. 더 이상 이런것 가지고 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이제 내가 미안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손사레를 치며 나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누군가 자신에게 그렇게 해 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다 얼굴이 붉어지고 코와 눈을 찡그린다. 10분 정도 이런저런 얘기 뒤에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바쁘시죠. 나는 딱히 바쁠것은 없지만 그를 붙잡지는 않는다. 그는 내가 바쁜것이, 혹은 바쁘지 않은 것이 자기 탓이라도 되는양 미안해하며 문을 나선다. 그를 보내는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동안 문득 그가 몇년 전보다 얼굴이 더 검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큰 키에 깡말랐다. 검은 뿔테안경때문에 얼굴 광대뼈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어깨는 한때 넓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안으로 굽어있다. 이때문에 그도 자기 자신이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걷는다. 쭈뼛거리는 태도가 몸에 배어있다. 그는 사무실 현관에서 내 방까지 들어오는 데 가장 오래 걸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조리가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주장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히면서도, 이것이 자기 입장에 불과하다는 것도 잘 안다. 한참 열을 올려서 얘기하다가도, 그냥 저는 그렇게 생각이 들더라구요, 라고 덧붙이는 식이다. 그러면 나도 좀 전에 내가 들었던 것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게 된다. 나는 그가 말하는 방식이 좋다.  


그리고 그에게서는 가난이 느껴진다. 아무리 애써도 떨어지지 않는 가난. 한번 검어진 피부가 하얘질 수 없듯이, 한번 스며든 가난은 씻어낼 수 없는 것 같다. 그는 정직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아왔을 것이고, 그 때문에 돈도 제대로 못만져보고, 대접도 제대로 못받아봤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가난은 특별해서 그를 좀먹기 않았으면 하지만, 그렇게 강한 사람을 난 본적이 없다. 가난이 불운함으로 인한 것이든 정직함으로 인한 것이든, 가난은 그저 가난일 뿐이다. 그가 지난 몇 년 동안 얼마나 고군분투 해왔는지 나는 안다. 그가 나에게 직접 말한 것은 아니다. 그의 직장 경력과 그의 수진 이력 사이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고통을, 비유가 아닌 몸의 고통을 참아오면서도 일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요즘도 고통을 참으면서, 새벽에 출근하고 역시 새벽에 퇴근하면서, 자신의 역활을 하려고 애쓰는 것도 오늘 알게되었다.


내가 해준 일에 비하면 그의 감사는 분명 과분하다. 나는 미리 받아야 할 돈을 나중에 받았을 뿐이고, 원해 흥정했던 돈보다 약간 적게 받았을 뿐이다. 그가 남루하지만 품위가 있다는 사실이 좋았고, 그래서 업무와 무관한 것을 이것저것 물어보고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 어느 것도, 누구도 나에게 이렇게 해준 적이 없어서요, 라고 하며 인생 풍파를 겪은 쉰여섯 사내가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고, 이미 계약이 끝난 다음에도 매년 추석이 되면 과일을 들고 찾아올 만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그가 오늘도 나를 찾아와 주었다는 사실이,  나에게 어떤 변화를 준 것 같다. 나는 알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8. 3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