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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성 Oct 07. 2019

출발 전날

2019. 10. 6. 자정무렵


이번주 내내 바빴다. 일요일 저녁에 일을 마무리짓고 퇴근하면서, 슬슬 가방에 우겨넣을 짐들이 뭐가 있을지 머릿속에 하나씩 떠올렸다. 그러다 그것들을 다 모으면 튤레 32리터짜리 가방이 버텨낼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침낭, 얇은 패딩, 오버트라우저, 우의, 스틱, 여분 겉옷 및 속옷,  가벼운 신발, 세면도구, 노트 등 간신히 밀어넣을 수 있었다. 가방은 터지기 직전이라 지퍼를 열기도 겁날정도지만 마음은 든든했는데, 카메라와 스틱을 넣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잠시 절망했다.


여행노트를 뒤적이다가 2015. 12. 22.에 쓴 노트를 발견했다. 이 당시는 레온무렵까지 외롭고 지루하게 걸었다. 약간 냉소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유쾌한 스페인사람 하비에르와 말이 잘 통했던 이탈리아인 자코모 덕분에 후반부는 제법 유쾌했다. 위 날짜는 팔라스 데 레이 전에 있는 오스 차코테스라는 마을에서 같이 식사를 한 날이었다. 이제 저 마을 위치가 전혀 기억이 안나지만, 당시 대화는 어렴풋하게 생각난다.


하비에르는 먹다 만 빵을 들고 '신이 당신의 운명을 모두 정해두었다'고 진지하게 선언했다. 나는 문어를 씹으면서 모든게 정해져 있다면 노력과 선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별 생각 없이 대거리를 했다. 그런데 그는 자못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운명이 이미 쓰여져 있지만, 열정적으로 따를 수 있다."


그는 평소에도 무슨 주제가 나오든 열을 내며 말했고, 나이가 오십은 훌쩍 넘어 보이는데도 자코모나 나와 격의없이 어울리면서 농담하는걸 즐겼다. 그가 피운 담배는 '실버라도'인데, 내가 그 바닐라향이 괜찮다고 하니 그는 그 뒤로 담배가게 여러군데를 뒤져서 같은 걸 사주었다. 정치 컨설턴트라는 아리송한 일을 한다고 했는데, 그가 말하는 방식이나 제스쳐가 너무 설득력있게 보여서, 그가 뭔가를 열중해서 얘기할때는 나도 모르게 넋놓고 바라보고는 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를 "mi presidente"(나의 대통령이여)라고 불렀다.


그가 열정적으로 운명을 따른다고 할 때, 나는 그 말에서, 적어도 그에게서 어떤 모순도 느낄수 없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와 이렇게 썼다. "열명이 까미노를 걷도록 운명지어져있다면, 그 중 한명은 열정적으로 그 중 한명은 냉소적으로 걸을 것이다. 어떤 것이 더 좋은 까미노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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