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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읽기 #31

통제사회 1편

by Homo ludens

[자유롭다는 착각]

인간 중심의 시대가 열렸다.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 이후 신이 아닌 인간이 중심이 된 이 시기를 "고전이 다시 태어났음"을 의미하는 르네상스(Renaissance)라고 불렀다. 인간이 중심이 되었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기준을 새롭게 마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이라는 이름을 빌리지 않고도 인간들이 모두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을 "객관성"이라고 부른다. 15세기 유럽인들은 어떻게 "객관성"을 공간으로 만들었을까?


객관적 공간(르네상스의 공간)에서나 투명성이 독재적인 시선의 전능성을 위한 전제가 될 수 있었다. - <투명사회>, 한병철, 93쪽 -

객관적 공간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는 입장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를 모두가 동일하게 인식할 수 있게 재현하는 것이 객관적 공간이다.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그 공간을 각기 다르게 인식한다면 그것은 주관적 공간이며, 이때 주관적 공간은 감정, 분위기와 같은 뉘앙스적 성격을 띤다. 공간을 객관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는 그림이 실제와 비슷한지 비교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었다. 거울에 비친 그림이 주변 배경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면 이 공간은 객관적으로 묘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왼편: 브루넬레스키의 도구; 오른편: 투시도를 위한 보조도구, 1710

이후 1710년에는 보다 정교한 투시도를 만들기 위해 바둑판과 같은 그리드에 배경을 투사하여 세계를 조각내어 재현했다.

<이상도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1480년대
<키클롭스>, 오딜론 레돈, 1914

15세기말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도시를 그리는 방법에서 일점투시도법을 이용했다. 모든 인간이 바라보는 단일한 시선, 하나의 눈으로 바라본 고정된 시각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듯하다. 하지만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이 시선은 지배자가 등장하는 순간 전제적인 시선, 즉 감시와 통제의 효율성으로 돌변한다.


벤담의 파놉티콘에 갇힌 수감자들이 감독관의 지속적인 현존을 의식한다면,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자유롭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 <투명사회>, 한병철, 95쪽 -

벤담의 파놉티콘에서 감시자의 눈은 하나다. 이 하나의 눈은 그가 늘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불안으로 우리 가 스스로를 감시하게 만든다. 이 감시자가 잠시 눈을 감는 순간 혹은 감시자의 힘이 약해지는 순간 피통제자는 우후죽순 자유를 향해 나선다.

Tizian_085.jpg <에우로파의 납치>, 티치아노, 1560

헤라는 완전한 감시의 눈으로 남편 제우스를 감시하고자 하지만, 제우스는 이 감시자의 완벽한 통제력을 역이용한다. 그것은 감시자의 눈만 가린다면 모든 정보는 은폐되고 만다는 것이다. 잠재적 혁명은 감시자가 눈을 깜빡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감시자의 눈을 피하는데 정통한 제우스는 호시탐탐 헤라의 눈을 피해 자신의 욕망을 분출할 기회를 노린다. 감독관의 지속적인 현존은 수감자들의 욕망을 무럭무럭 자라게 만들고, 이 욕망은 감독관이 사라지거나 교체될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Brave_New_World_1980.jpg 영화 <멋진 신세계>, 버트 브링커호프, 1980

1932년 올더스 헉슬리가 발표한 <멋진 신세계>는 1980년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이 작품에서 신세계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세계에 대한 만족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주어진 사회와 자신들의 계급에서 자유를 느끼며, 어떠한 욕망도 더 가지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매트릭스 속에서 완전한 만족을 느낄 뿐이다. 그들이 빼앗긴 것은 자유가 아닌 "더 많이 욕망하기"위한 의지다. 진정한 자유와 해방은 창조적 의욕에서 찾을 수 있다.


의욕은 해방을 가져온다. 의욕이 곧 창조이기 때문이다. 나 그렇게 가르치노라. 그러니 너희는 다만 창조를 하기 위해서만 배워야 하리라!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낡은 서판들과 새로운 서판들에 대하여 16장 中, 프리드리히 니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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