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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읽기 #33

통제사회 3편

by Homo ludens

[무지와 신뢰]

디지털 파놉티콘에서 주민들은 서로에 대해 투명하게 자신을 공개한다. 상호감시 상태에서 그들은 서로에 대해 의심할 거리를 제거했다. 작가 한병철은 이러한 의심의 부재 상태를 동시에 신뢰의 부재 상태로 바라본다.


데이비드 브린(David Brin, 1950-)은 <투명한 사회(transparent society, 1998)>에서 이상적 투명사회는 "아래로부터의 감시(sousveillance)"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감시사회의 문제는 "위로부터의 감시(surveillance)", 즉 비대칭적 권력구조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시민들이 자신의 핵심적인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면 투명사회는 충분히 살만한 곳이 된다고 말한다. 브린은 "핵심적인 질문은 시민들이 이 인간적인 절실한 욕구를 실행할 만큼 강력하고, 주권적이며,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지 여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작가의 비판과 같이 브린이 주장하는 "모두에 의한 모두의 감시, 감시의 민주화"는 상호 감시의 긴장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발가벗길 수밖에 없다. "투명한 사회"는 "비인간적인 통제 사회로 전락"할 것은 자명하다. 인간과 인간 사이, 기관과 개인 사이는 감시의 관계만 남을 뿐 '신뢰'가 존재할 공간은 사라진다.

신뢰는 오직 지知와 무지의 중간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신뢰는 타인에 대한 무지에도 불구하고 그와 긍정적 관계를 맺게 한다. 신뢰는 무지에도 불구하고 행동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내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신뢰란 것은 아예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 <투명사회>, 한병철, 98쪽 -

신뢰는 라틴어 fides로 로마시대부터 종교적, 정치적 가치를 지녔다. 피데스는 사람들 사이의 믿음, 충성, 약속을 지키는 행위 전체를 포괄한다. 또한 인간과 인간뿐 아니라 국가와 개인, 국가와 국가, 신과 인간 사이의 계약과 약속을 상징한다.

Plotina_-_sestertius_-_RIC_0740.jpg 세스테르티우스의 주화, 오른편은 주화의 뒷면으로 피데스가 그려짐

인류가 문명사회를 만들 수 있었던 큰 이유는 신뢰이다. 경제적으로 서로 의존할 수 없으면 문명사회는 도래할 수 없었음이 자명하다. 경제적 의존, 즉 분업화는 화폐를 통해 복잡하고 거대한 규모의 사회를 만들 수 있게 만들었다. 신뢰사회에서 개인의 역량은 '신용'으로 평가받는다. 신용은 불확실한 개인의 삶의 과정에서 확실성을 증명할수록 커진다. 불확실성이 큰 사회일수록 신용의 가치 역시 높게 평가된다. 모든 구성원의 신용이 투명하게 드러날 때, 그 사회는 노골적인 계급사회와 다르지 않다. 즉 투명사회에서 신뢰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 계급이 고착된 상태에서는 적극적 행위는 소모적이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은 개인에게 자신의 평가를 높일 수 있는 기회, 즉 신뢰를 쌓을 수 있는 가능성을 허락한다.


T_Noble_S_Webster_MissUnderstoodMrMeanor.jpg <미스 언더스투드 앤 미스터 미노어>, 팀 노블과 수 웹스터, 1997

팀 노블과 수 웹스터는 사물의 잔해를 모아 아상블라주(assemblage) 기법을 통해 쓰레기처럼 모여있는 잔해 덩어리에 새로운 형태를 부여한다. 잔해들의 조합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의 불확실성, 즉 무지의 상태를 보여준다. 쓰레기더미가 모여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것은 그 자체로 어떠한 쓸모도 상징도 되지 못한다. 버려진 것들의 모음은 특정 각도에서 빛이 비치는 순간 특수한 앎의 단계로 들어선다. 예술가는 '무지와 지' 사이의 공간에 쓰레기와 같은 사물의 집합(assemblage)을 구성하여 '반기념물'을 '기념물'로 전환하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누군가가 쓰레기 더미에서 남녀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말한다면 누구도 그를 믿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쓰레기 더미에 빛이 비치는 순간은 그의 시선이 존재했음이 증명된다. 그것이 '신뢰'이다.

tumblr_nkdzav9DBt1qa2qxto1_1280-480x4301.jpg <No가 Yes로 변하다>, 마르쿠스 랫츠, 2015

스위스의 예술가 마르쿠스 랫츠(Markus Raetz, 1941-2020)는 불연속적 조각형태를 이용해 시점에 따라 다른 것을 재현하는 예술품을 즐겨 만들었다. 그의 <No가 Yes로 변하다>는 '옳고 그름', '맞다'와 틀리다', '그렇다'와 '그렇지 않다'의 대립되는 개념 역시 하나의 형태 속에서 드러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독일어로 '맞지만 아니다' 혹은 '맞다고 볼 수 있지만 아니기도 하다', '아니라고 말하기엔 맞기도 하다'는 것을 'Ja(yes)'와 'nein(no)'의 합성어 'Jein'으로 표현한다.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불확실성은 '옳고 그름' 자체가 관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특정 공간, 특정 시간에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서 동의될 뿐이다. 그들은 그들의 판단에 대한 동의를 '신뢰'라고 말한다. 랫츠가 보여주듯 '그렇다'와 '아니다'가 동시에 표현될 수 있는 기호는 존재한다. 그것은 불명확성, 즉 무지의 공간이 있기에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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