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니체 22일 차 - 배후 세계의 정체?

<배후 세계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by Homo ludens

[고통과 자기 극복]

차라투스트라는 한때 자신이 '낙타'의 정신에 머물러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낙타'의 정신은 특별히 굽신거리고, 고통스러우며, 의욕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즉 세계관에서 그 실체가 드러납니다.

일찍이 차라투스트라도 배후 세계를 신봉하는 자들 모두가 그리하듯이 인간 저편에 대한 망상을 품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이 세계는 고뇌와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신의 작품으로 보였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세계 이면에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믿었던 시기를 거칩니다. 우리가 '사후 세계'라고 부르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는 세계를 믿는 것과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는 자연을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을 다루는 학문을 '형이상학(metaphysic)'이라고 불렀는데, meta는 '~저편에'라는 뜻을, physis는 '자연'을 뜻합니다. 자연의 저편에 존재하는 것, 즉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을 움직이는 세계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플라톤은 이 세계를 이데아(idea)라고 했으며, 기독교에서는 이 철학적 개념을 '천국'과 연결시켰습니다. 니체는 '낙타'의 정신의 근원은 '인간 저편'에 대해 확신하고, 현재 삶의 고통을 '저편'을 위한 희생이라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저편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0_big.jpg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도식
영원히 불완전한, 영원한 모순의 모사, 그것도 불완전한 모사인 이 세계. 그것을 창조한 불완전한 창조자에게 있어서의 도취적 즐거움. 세계는 한때 그렇게 생각되었다.

니체는 '저편의 세계'를 만든 것은 신이 아닌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플라톤은 우리는 동굴 속에 갇힌 죄수이며 그곳 묶여 횃불에 비친 그림자를 실제로 여긴다고 비유합니다. 실제 세계는 동굴 밖의 태양이 비추는 자연입니다. 니체는 플라톤의 이 세계관을 반박하고자 합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그림자의 세계'는 '영원히 불완전한, 영원한 모순의 모사, 불완전한 모사인 이 세계'를 말합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불완전한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 역시 불완전합니다. 이 세계의 불완전성이 창조주의 완전성을 돋보기에 만들기 때문에 창조주는 자신의 불완전한 창조를 통해 불완전한 세계에 사는 우리에게 완전한 세계를 동경하게 만들고, 우리의 동경에 창조주는 도취적 즐거움을 느낀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플라톤은 신을 완전한 '선'으로 여겼으나, 니체의 비판에 따르면 완전한 '선'이 만든 '불완전한 선'은 그의 불완전성을 증명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불완전한 신'은 '완전한 선'으로 원래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 인간의 작품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불완전한 신'을 인간들은 왜 만들었을까요?


아, 형제들이여, 내가 지어낸 이 신은 신이 모두 그리하듯이 사람이 만들어낸 작품이자 광기였다! 그는 사람이었고, 사람과 자아의 빈약한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이 유령이 그 자신의 재와 불길로부터 내게 온 것이지. 진정! 저편의 세계에서 온 것은 아니었다!

결국 신, 운명 등 결정된 미래에 대한 모든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시키기 위한 신경안정제입니다. 인간은 미래를 알고 있는 존재가 현재의 고통을 일종의 시련의 과정이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현재의 고통이 의미 없는 것이라면 견디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모든 고통에는 목적과 이유가 있다는 설정은 심리적으로 큰 효과를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고통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누군가 내 고통으로 인해 이익을 본다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있다면 어떨까요?


배후 세계라는 것을 꾸며낸 것은 고뇌와 무능력, 그리고 더없이 극심하게 고뇌하는 자만이 경험하는 행복에 대한 저 덧없는 망상이었다.
단 한 번의 도약, 죽음의 도약으로 끝을 내려는 피로감,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바라지 못하는 저 가련하고 무지한 피로감, 그와 같은 것이 온갖 신과 배후 세계라는 것을 꾸며낸 것이다.

죽음이라는 근원적 공포는 자기 상실에 대한 고뇌와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무능력에 의해 강화됩니다. 따라서 종교는 죽음이라는 것을 이번 생의 마무리이자 생 이후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현재 삶의 피로함을 깨끗이 정리하기 위해서는 이번 생을 평가하는 일종의 '최후의 심판'이 필요했고, 그것을 통과한 자들만이 궁극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설정이 등장합니다.

Last_Judgement_(Michelangelo).jpg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1540

문제는 최후의 심판을 통과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서 그리스도의 아래에 위치한 사다리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인물과 신체의 가죽을 들고 있는 사람 사이의 공간은 매우 좁습니다.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영혼의 순결함을 혹독하게 평가받고 육체라는 가죽을 버리고 나서야 그 좁은 사다리를 통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인간이 저지른 '원죄'에 대한 벌을 면죄해 주는 '면벌부'를 교황청에서 발행한 것에 대한 반항을 계기로 시작됩니다. 인간의 근원의 공포를 마케팅으로 이용하여 이익을 보는 세력이 누구보다 신의 신성함을 해쳤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들고 인간들로 이루어진 집단은 불완전하여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삼는 과오를 범합니다. 그들이 만든 공포와 위안이 커질수록 배후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믿음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현생에서 그들이 열심히 노동하여 번 돈은 위안의 대사로 지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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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테레사의 환희>, 잔 로렌초 베르니니, 1647-52

이탈리아의 예술가 베르니니는 성 테레사가 천사를 만나 느끼는 환희의 순간을 조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성 테레사가 느끼는 육체적 고통은 영혼의 환희와 같습니다. 그녀는 기꺼이 고통을 받아들이고, 보는 이들은 그녀의 고통에서 숭고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통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비록 육체도 그 고통에 참여하지만 말이다. 이것은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서 일어나는 너무나 달콤한 사랑의 애무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힘입어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랑을 느끼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 <예수의 테레사의 생애>中, 아빌라의 테레사 -


성인들이 수난과 자기희생은 니체가 말하는 자기 극복에서 완전히 어긋난 있지는 않습니다. 현재의 안락함에 안주하지 않고 고통으로 나아가 정신적 성장의 즐거움을 맛보는 것은 니체의 자기 극복과 궤를 같이 합니다. 낙타의 정신은 고통 자체에 대한 회피, 고통을 잊지 위한 마약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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