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과 반복되는 착취구조]
나소스 바칼리스 (Nassos Vakalis) 감독의 애니메이션 "Dinner for few" (소수를 위한 만찬)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착취구조의 "시스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Those who eat their fill speak to the hungry of wonderful times to come"
- Bertolt Brecht -
브레히트의 인용문으로 감독은 영화 전체를 요약한다.
원없이 먹은 자들은 배고픈 자들에게 다가올 환상적인 날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는 격식을 갖춘 일군의 돼지들이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상한 것은 그들이 머무는 장소가 절벽 위에 위치한 호텔이라는 것인데, 이 방만 모서리가 뜯겨져 외부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깥은 비가 오는 흐린 날씨. 검은 바다에는 파도가 일렁인다. 법관을 상징하는 가발을 쓴 돼지, 성직자를 상징하는 옷을 입은 돼지, 안경을 쓴 지적인 돼지 등 그들은 사회적으로 상층부에 해당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음식을 질서있게 나누어 먹으며, 감정의 동요없이 식사를 이어나간다. 식사를 제공하는 야만적인 버틀러는 음식을 만드는 기계에 각종 가구와 집기들을 넣어 식사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만찬에 이용한다. 식탁 아래에는 흰고양이와 검은고양이가 음식을 갈구하는 소리를 내며 집사와 만찬 참가자들 주위를 어슬렁 거린다. 이 고양이들은 그들이 베푸는 음식에 기댈 수 밖에 없다.
그런 와중 검은고양이 한마리가 테이블 아래로 떨어진 초코볼을 줍기 위해 식탁보 아래를 더듬거리다 장막의 뒷편을 목격하게 된다. 충격적인 진실은 만찬 참가자 모두 쇠사슬로 묶여 있다는 것이고, 쇠사슬은 마치 뱀과 같은 형상으로 그들을 옥죄며 계속 음식을 갈구하기를 종용하는 듯 하다. 그리고 목격자 고양이를 쥐도 새도 모르게 식탁보 아래로 빨아들인다. 차츰 음식을 만들기 위한 재료들은 사라져가고 참가자들 사이의 매너도 웃음도 함께 사라져간다. 이에 반해 흑백의 고양이 무리들의 아우성은 커져만 간다.
결국 더 이상 먹을 것이 나오지 않고 굶주린 참가자들은 접시를 핥고 먹기에 이른다. 분노한 고양이떼는 식탁 위로 행진을 시작하고 작고 나약한 고양이 무리는 이제 포식자인 호랑이로 변한다. 분노한 호랑이는 참가자들을 하나씩 처리하고 잠에 빠져든다. 이제 숨어있던 집사는 칼로 호랑이를 죽이고, 호랑이의 뱃속에서 어린 고양이 무리를 꺼내어 또 다른 방에 풀어놓는다. 이 고양이들 가운데 일부는 다시 새로운 게임의 참가자로 변한다. 한 참가자가 상자를 꺼내어 그 속에서 식기를 꺼내고 서로 나누며 다시금 게임이 시작된다.
혁명의 반복과 넘어설 수 없는 시스템
이 영화는 결국 반복되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그리고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소수의 지배층에 대한 피지배층의 혁명, 그리고 혁명의 끝에 생겨나는 또 다른 소수의 지배의 반복을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에 식기를 꺼내는 상자의 윗부분은 길쭉한 개구부가 있다. 이는 투표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새로운 혁명을 통해 피지배자들의 대리인을 뽑는 행위가 새로운 지배층의 식기를 나누는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지적한다. 소수인 지배자들 역시 자신을 배불리기 위해 "소비" 하는 자본주의의 본능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일종의 "족쇄"에 묶여있을 따름이다. 지배자들 개개인으로 보자면 무절제한 본능의 충족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주어진 본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은폐된 족쇄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족쇄는 뱀의 머리를 띤 형상을 하고 있다. 뱀은 성경에 등장하는 지혜의 신으로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하는 역할을 한다. 선악을 판별하는 능력을 지닌 인간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별이 하나였던, 즉 신의 판별이 유일한 기준이었던 세계를 버리고 모든 인간이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세계로 왔다. 선악의 저편으로 넘어온 인간들은 각자의 이익과 기준에 맞춰 행동하기 시작했고, 인간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성은 무너져만 갔다. 그리하여 소수의 특권을 가진 자들이 그들의 이익을 유지하거나 증식하는 본능을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는 것을 선, 그것을 잃어버릴 위기를 초래하는 것을 악으로 규정했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주인의 덕과 노예의 덕의 탄생이다.
이러한 도덕의 형성은 주인인 소수의 지배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하는 도덕의 내면화를 이루어냈으나 동시에 그들이 갖추어야 할 의무를 동시에 만들어냈고, 이 의무감은 그들이 만든 법에 그들이 앞장서서 복종하는 또 다른 족쇄를 만들어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이 족쇄는 그들이 만들어낸 민중의 호랑이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필연의 심판으로 작용한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첫번째 방의 벽에는 아크로폴리스의 사진이 걸려있다. 서구의 민주주의와 철학의 상징인 도시, 그 도시의 가장 성스러운 곳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두번째 방의 벽에는 산업혁명을 상징하는 기계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이 두 방은 각기 다른 시대를 지배하는 시스템들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를 관통하는 에피스테메와 산업혁명과 그 이후 시대를 관통하는 에피스테메. 이들은 2000년의 시간의 차이를 두고도 변하지 않는 시스템의 공고함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를 구성하는 소수의 지배층인 시민계급은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노예를 기반으로 그들의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산업시대에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고결한 노동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이룩할 수 있었다.
고대그리스의 먹거리는, 다시말해 자원,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자면 생산수단은 땅과 노동력, 밭과 노예였다. 산업사회의 생산수단은 노동자와 기계, 공장, 전기 등이다. 그렇다면 이 두번째 방에서의 사이클이 끝나고 나면 세번째 방의 벽에 걸리게 될 사진은 무엇일까? 지금 우리는 어떤 사진을 채우고 있는 것일까?
영화에서 감독은 어마어마한 변화와 진보를 만들어 낸 인류의 경제, 정치, 사회 시스템은 그 속에서 공고한 하나의 위계를 가지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결국 어떠한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내더라도 그 가운데 발생하는 소수의 권력, 경제에 대한 과점 현상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그것이 전체의 생존을 위협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지배자없는 지배, 법없는 규칙, 이런 것들이 가능할까?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혁명은 충분히 성숙한 자본주의의 순간에 급작스러운 전환을 통해 가능하는 꿈을 꾸었다. 이전의 모든 공산주의 국가는 이 초기조건을 만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실패를 맛보았다. 그렇다면 슬라보예 지젝이 제안하는 "성장을 멈추라!"는 표어는 '정지를 통한 도약'이라는 모순적 성공에 이를 수 있는 대안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영화가 보여주는 암울한 시지프스의 형벌에 니체는 유일한 해답은 amor fati 라고 대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