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니체 70일 차 - 창조하는 자들의 고통?

<행복이 넘치는 섬들에서 2>

by Homo ludens

[창조하는 자들의 고통]

차라투스트라는 우리의 행복을 방해하는 일체의 가상의 것에 대한 믿음을 비판합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 것들은 변화하는 세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세계, 즉 불멸의 세계가 존재하고 그것이 더 가치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일체의 불멸의 존재, 한낱 비유에 불과하다! 시인들이 너무도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최상의 비유라고 한다면 불멸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생성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그런 비유는 일체의 덧없는 것들에 대한 찬미가 되어야 하며 정당화해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시인들은 영원한 것들에 대한 찬양, 즉 추상적인 것들에 대해 노래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일체의 불멸의 존재라는 허구적 상징, 가령 신과 같은 개념은 '비유'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비유'는 대상에 대한 본질적 통찰이 아닌 특정한 성질만을 부각하는 표현입니다. '호수 같은 눈망울'은 깊고 반짝이는 눈빛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지, 눈이 가진 구조적 특징과 인식의 관계를 포함하지 못합니다. 이렇듯 '아직은 잘 모르는 원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우연 뒤편의 원리' 등을 불멸의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무지'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히려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물음과 탐구가 '지'로 향하는 올바른 자세이며,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남긴 '무지의 지'에 대한 참된 이해일 것입니다.

그렇다, 창조하는 자들이여. 너희 삶에는 쓰디쓴 죽음이 허다하게 있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는 덧없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정당화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 자신이 다시 태어날 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산모가 될 각오를 해야 하며 해산의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

물음과 탐구는 기존의 '지'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합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말한 것과 같이 참된 지식은 끊임없는 기존 지식의 죽음과 함께 생성됩니다. 소크라테스는 새로운 지식을 탄생시키기 위해 출산을 돕는 역할을 자처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의 탄생을 도왔습니다. 우리는 그의 지혜를 받아 고통을 감내하여 자신의 알을 깨고, 새로운 자신을 잉태해야 합니다.

더-이상-의욕하지 않기, 더-이상-평가하지 않기, 그리고 더-이상-창조하지 않기! 아, 이 크나큰 피로가 나를 떠나 영영 아주 먼 곳에 머물러 있기를! 깨닫는 일에서도 나는 내 의지가 갖고 있는 생식-욕구와 생성-욕구만을 느낀다. 그리고 나의 깨달음에 순진무구란 것이 깃들어 있다면, 그것은 생식에 대한 의지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리라.

차라투스트라가 지적하는 가장 위험한 상태는 '현재의 무지'가 아닙니다. 그는 '의지의 소멸'을 경계합니다. '의욕의 부재'는 시도와 물음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인간이 영속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번식, 즉 생식의 욕구이듯 지적 창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알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철학자 칸트는 '알고자 하는 의지'에 큰 용기가 필요함을 알고 있었기에 "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나의 불과 같은 창조 의지는 언제나 새롭게 나를 사람들에게로 내몬다. 망치를 돌로 내모는 것이다.... 이제 나의 망치는 저 형상을 가두어두고 있는 감옥을 무섭게 때려 부순다.... 만물 가운데 가장 조용하고 경쾌한 것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감히 알려고 하는 태도는 기존의 지식을 망치고 부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불편한 진실을 그냥 넘기지 않는 용기는 스스를 망치로 만들어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상식을 깨부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지식이 태어나자마자 이제 '불편함'을 사라지고 우리는 새로운 질서의 고요함을 찾을 수 있습니다. 뉴턴의 물리학이 가져다준 약간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 아인슈타인이 커다란 논쟁거리를 통해 약간의 불편함을 해결하는 업적을 이룬 것처럼, 역사적 진보는 그러한 용기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Prisoners-or-Slaves-by-Michelangelo.jpg <깨어나는 노예>,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1525-30

미켈란젤로는 1525년에서 1530년 사이에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무덤을 위해 '죄수들'이라는 연작을 제작합니다. 그 가운데 <깨어나는 노예>는 미완성으로 남겨진 작품인데, 그는 의도적으로 '미완성(non-finito)' 상태로 완성했다는 주장이 일반적입니다. 이 거장은 노예 상태를 깨어나지 못한, 구속된 정신과 육체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의해 구속된 인간의 한계, 그리고 자신의 관점 밖의 것에 둔감한 인식의 한계 등은 우리를 영원의 감옥 속에 가두게 됩니다. 용기를 내어 구속의 얼음을 깨어내고 자유를 얻더라도,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 다시 얼어붙어 구속되는 영원의 감옥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니체는 끝도 없는 시련에 굴복하지 않고, 매 순간 저항하려는 의지를 갖는 것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위대함을 위한 나의 공식은 amor fati다. 그가 다른 것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 앞으로도, 뒤로도, 전부 영원히. 필연적인 것은 그저 견뎌내는 것이 아니며, 감추는 것은 더욱더 아니라, - 모든 이상주의(관념론)는 필연적인 것 앞에서 허위다. -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다 -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中, 프리드리히 니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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