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규범을 찾아서 - 19세기 후반
19세기 후반 유럽의 예술계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산업화를 통해 증가한 생산력은 산업화를 이끈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도시들의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고, 이러한 대번영의 시기에 대중들에게 제공되는 제품들은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부유해진 대중들은 고품질의 다양한 상품을 원했지만, 산업화의 생산품은 질 낮고 획일화된 상품만을 시장에 내놓을 뿐이었다. 건축에서는 팽창하는 도시를 풍요롭게 할 다양한 디자인을 찾지 못하고 기존 건축 언어의 복제, 재생산의 반복을 통해 "잡다한 양식"의 건물을 채워 넣기 급급했다. 급격한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던 공급의 한계 상황에서 등장한 인물이 영국의 존 러스킨(John Ruskin, 1811-1900)과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미술과 수공예의 개혁을 외쳤다. 개혁은 19세기 영국의 디자인과 장식에 대한 것이었고, 다양한 디자인과 장식을 위해 전통적 수공예업자들의 생산방식이 그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수공예품의 생산력이 기계를 통한 대량생산품의 공급을 따라갈 수 없었기에 그들의 시도는 이후 사치품 제작이라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공산품의 질적 수준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후 독일공작연맹(Deutscher Werkbund)과 바우하우스(Bauhaus)로 이어져 근대 디자인의 혁신적 발전의 기초가 된다.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가 주도한 영국의 '미술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는 중세적 사회로의 회귀를 통해 미술의 쇄신을 꾀했기에 현실성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들의 재료에 대한 연구는 디자인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예술', 즉 '아르누보(Art Nouveau)'로 이어졌다. 아르누보는 단어 그대로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으로 "심미주의적이고 장식적인 경향의 미술 운동"을 가리킨다. 이러한 '새로운 예술'을 향한 도전은 유럽의 각 지역에서 다른 이름으로 시도되었는데, 독일에서는 '젊은 양식'을 뜻하는 '유겐트슈틸(Jugendstil)', 스페인에서는 '모데르니스모(Modernismo)', 오스트리아에서는 '과거 미술과의 분리'를 뜻하는 '분리파(Secession)', 이탈리아에서는 '자유 양식(Stile Liberty)' 그리고 네덜란드에서는 '새로운 예술(양식)'을 뜻하는 'Nieuwe Kunst/Stijl'이었다. 새로운 미술에 대한 시도는 순수예술보다는 공예, 포스터, 건축, 장식 등의 응용미술에서 두드러졌고, 당시 회화분야의 다양한 시도, 즉 인상주의, 라파엘 전파 등의 영향을 받았다.
아르누보는 약 1890년부터 1910년 사이에 시도된 미술의 경향을 일컫는 말로 르네상스, 그리스, 로마의 고전적 미술 언어보다는 '자연'에서 해답을 찾고자 하는 특징을 보인다. 건축분야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이전 양식들과 단적으로 구분된다.
벨기에의 브뤼셀에 위치한 호텔 타셀은 건축가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 1861-1947)가 1892년에서 93년 사이에 완성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이다. 건물 외관의 3,4층부의 창은 녹색의 철제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고, 식물의 모양을 연상시키는 장식적 특징을 보인다. 호텔 타셀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내부 계단실의 디자인은 바닥의 패턴, 벽의 장식, 계단실의 손잡이와 철제 기둥에 이르기까지 모두 식물의 줄기가 뻗어 나와 이루어진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구조물 자체가 장식이고, 장식이 구조적 역할을 행하고 있는 이러한 양식은 러스킨과 모리스가 주장한 질 좋고 고귀한 디자인의 구현이다. 이 디자인에서의 또 다른 특징은 유럽 미술이 고대부터 간직해 오던 좌우대칭(symmetry)의 강박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오르타뿐 아니라 이 시기의 많은 예술가들은 유럽 미술이 처한 위기 상황에 대한 해답을 일본의 미술에서 찾고자 했고, 오르타 역시 일본의 건축 양식이 보여주는 비대성에서 용기를 얻었다.
또한 같은 해에 지어진 파리의 지하철 역과 빈의 도시철도 파빌리온은 오르타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곡선과 식물의 장식을 철제 구조물로 구현했다. 건축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외형적으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보이는 이면의 잠재력은 철제 구조물의 사용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석재 기둥이 철제 기둥으로 바뀌는 순간부터 기둥의 두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얇아지고, 이러한 수직성의 시각적 효과와 공간적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또한 철과 콘크리트 그리고 유리의 조합으로 만들어질 다음 시기의 건축물들은 기존 건축의 모든 요소와 양식을 재평가하게 만들었다.
미술사를 바꾼 가장 혁명적 인물을 고르라면 반드시 등장하는 화가가 폴 세잔이다. 세잔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그의 그림이 왜 역사를 바꾼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소회를 종종 듣게 된다. 역사적 평가는 첫 아이디어를 선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시도가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가져야 그에 합당한 평가를 받는다. 세잔은 20세기 초에 등장하는 아방가르드 운동을 연 예술가이자 19세기 유럽 미술사 최고의 업적인 인상파와 20세기 초의 괄목할만한 결과물인 입체파의 가교 역할을 했다. 그는 관점에 대한 혁명을 이루었고, 인상주의의 한계를 직시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의 시도는 당대 주류 미술계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고, 에콜 드 보자르는 그를 두 번이나 거부한다. 당대 주류 미술계가 지키고자 했던 '재현미술'에 대한 비판을 세잔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자연을 그린다는 것은 대상을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감각을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실험한 순간의 인상의 포착과 색채의 다양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지속력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한 세잔은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인상주의 회화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인상주의를 보다 견고하고 지속적인, 이를테면 미술관의 전시물과 같은 무엇인가로 바꿔야 한다.>
세잔은 자신의 고향 프랑스 남부의 액상프로방스의 생트빅투아르산(Mont Sainte-Victoire)을 여러 점 남긴다. 세잔은 <자연으로부터 푸생>을 그리는 것을 자신의 모토로 삼았다. 푸생이 풍경화에 남긴 족적에 대해 세잔은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세잔은 푸생의 풍경화의 구도와 색채의 배치, 그리고 형태에 주목했다. 푸생의 <여름>을 보면 화면의 중앙 약간 윗부분 먼 곳에 산이 있고 왼편에 나무가 프레임을 만들어주고 있다. 세잔은 이 구도를 거의 차이 없이 사용하고 있다. 푸생이 가까운 들판의 노란색과 중간중간의 녹색 그리고 먼 산과 하늘을 푸른색으로 그린 것 역시 세잔은 그대로 따르고 있다. 푸생이 그린 이 자연은 인상파 화가들이 주목한 '순간'의 모습이 아니다. 세잔은 푸생의 풍경화는 낮시간과 일출, 일몰의 시간의 색채를 고스란히 담은 푸생이 새롭게 구성한 것이라 생각했고, 자신은 색의 배열을 붓터치를 통한 색면으로 그려냈다. 1885년에서 1887년의 생트빅투아르산의 모습에서 1904년에 이르면 가까이 있는 집에 형태를 제외한 나머지 집들과 나무들의 형태는 무너져간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색면의 크기의 변화를 통해 안정감 있는 구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또한 일몰의 빛에 의해 물들어버린 산과 하늘의 색이 유사해지는 푸생의 풍경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1904년 버전에서 산과 하늘은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색채의 차이를 보인다. 세잔은 일련의 풍경화를 통해 구상화의 요소들을 점차 제거하고 추상화로 이행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특히 1904년도 버전에서는 입체파에서 등장할 색면의 분리 효과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세잔은 정물화를 통해 또 다른 시도를 감행한다. 고전주의 미술에서 완성한 투시도법은 한 점에서 형성되는 과학적 작도를 통해 가상의 삼차원을 이차원 화면에 투사한다. 하지만 사람은 두 개의 시점, 즉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두 눈을 번갈아가며 가려보면 사물이 조금씩 다른 시점으로 끊어져 연결되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과 바구니>의 테이블을 주목해 보자. 테이블의 왼편과 오른편은 중앙의 하얀 천에 의해 분할된다. 그리고 시각적 연장선을 만들어보면 테이블이 온전히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얀 천의 중앙에 접힌 부분은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의 분절된 두 시점의 경계선이다. 세잔은 의도적으로 두 가지 시점의 공존을 한 화면에서 구현한다. 전통적 구상화는 외눈박이 괴물의 시점을 재현했고 관찰자들의 다양한 시점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종교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대도시에 모인 다양한 지역의 문화들의 혼재는 획일적 기준의 와해를 불러왔고, 세잔의 다시점 회화는 이러한 세태에 대한 인식과 맞물려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림의 사과는 유난히 둥근 모양을 보인다. 사과는 보는 각도에 따라 두 개의 C 커브가 겹친 모양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사과의 모양을 겹친다면 원이라는 도형으로 수렴된다. 이러한 형태적 원형을 세잔은 '모티브(motif)'라고 부른다. 이 역시 사물에 대한 한 시점의 지배성을 부정하고, 사물 자체가 가진 본질에 주목한 세잔의 관점이 반영된 결과다. 다른 정물들에서는 같은 높이에서 본 듯한 접시나 물병의 면이나 입구의 왜곡된 면이 현실성 없이 그려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역시 다양한 높이의 시점을 한 화폭에 구현한 것이고, 이러한 다시점의 회화 기법은 세잔을 유일한 스승으로 칭했던 파블로 피카소의 입체파로 이어진다.
쇠라는 폴 시냑(Paul Signac, 1863-1935)과 함께 점묘법의 창시자다. 쇠라는 섬유 상인이자 아마추어 화가인 삼촌의 영향을 받아 미술에 입문했다. 그는 샤를 블랑(Charles Blanc, 1813-1882)의 "회화 예술의 문법"에서 색상의 법칙에 대해 공부했다. 또한 외젠 셰브뢸(Eugéne Chevreul, 1789-1886)의 "색상의 동시 대비와 색상환"에 관한 연구를 공부하여 과학적 색채 연구를 미술에 적용했다: "(색채의) 조화의 법칙은 음악의 법칙을 배우는 것처럼 학습할 수 있다."
쇠라는 흐릿한 데생을 통해 사물의 형태를 표현하는 연습을 했다. 특히 <하얀 옷을 입은 아이>의 경우 가능한 흐릿하게 흔적만을 그려내어 관찰자의 시각적 연상이 아이의 형상의 완성하도록 했다. 완벽한 구상에 비해 쇠라의 기법은 화사한 햇빛에 서있는 아이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효과적 방법에 성공했다.
쇠라는 이론적 탐구를 통한 색에 대한 지식을 이용해 회화를 완성시켰다.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과 <서커스>는 화사하고 밝은 느낌이 난다. 셰브뢸과 샤를 블랑의 색도표와 색채이론에 의해 빨강, 노랑, 파랑의 색채를 이용한 배색의 효과를 그림에서 구현했다. 특히 <서커스>는 빨강, 노랑, 파랑을 극단적으로 사용했고, 나머지 색들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림에서 나타나는 보라색과 주황색 등은 노랑과 파랑, 빨강과 노랑의 시각적 융합으로 관찰자에게 보일 뿐이다. 이러한 '분할주의' 혹은 '색광주의'라 불리는 이론을 통해 쇠라는 '물리적으로 색소를 섞는 대신 시각적으로 색채를 결합하도록 관찰에게 요구'했다. 이러한 이론을 통해 회화에서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광도를 흰색의 채색 없이 구현했다.
그림만큼이나 삶 자체로 대중에게 잘 알려진 빈센트 반 고흐는 길지 않은 37년의 삶 동안 영원히 남은 미술의 업적을 남겼다. 특유의 임파스토 기법이라 불리는 두꺼운 물감의 사용은 실제 작품을 보는 것과 도판으로 보는 것의 간극이 가장 큰 화가 중 하나로 그를 기억되게 했고, 특유의 색채의 배열은 강렬한 인상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정신병의 발작과 망상으로 동생 테오를 제외하고 누구와도 지속적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던 빈센트는 1890년 리볼버로 가슴을 쏜 후 생을 마감했다. 사후에도 빈센트는 야수파와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의 화풍에 큰 영향을 주며 그의 흔적을 남겼다. 그가 남긴 그림의 대부분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작가 스스로의 설명이 남아있다. 빈센트는 테오에게 총 600여 통의 편지를 썼고, 그 속에 개인적 고민과 미술에 대한 의도를 담았다.
고흐는 아를 근처의 생 레미의 정신 병원에 머물렀는데,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은 병원의 창문에서 바라본 풍경에서 영감을 받았다. 죽음을 상징하는 사이프러스 나무는 이글거리듯 화면 오른쪽에 우뚝 솟아있다. 하늘과 구름은 소용돌이치듯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쉴 새 없이 시선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배경의 산은 두꺼운 윤곽선의 굽이치는 곡선으로 무게감을 느끼게 만든다. 화면의 전면은 녹색, 노랑, 녹색의 반복되는 색의 배치를 통해 황금빛 밀밭의 두터운 흐름에 주목하게 한다. 부분적으로 들어간 붉은 꽃잎은 보색의 배치를 통해 확연한 입체감을 부여한다. 빈센트는 동생 테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보색들이 동등한 가치로 취해졌을 때... 그들을 나란히 놓으면 서로서로를 너무나도 격렬한 집중도에까지 올려놓아서, 인간의 눈을 그것을 참고 보기조차도 힘들 것이다.>
세잔과 고흐는 기존 회화에서 뒤섞인 색조를 쓰던 것에서 해방되었다. 특히 고흐는 스스로를 '색채주의자(colorist)'라고 부를 정도로 본연의 색을 쓰길 바랐다. 세잔과 고흐의 색채를 자세히 살펴보편 뒤섞인 색채를 캔버스에 바르기보다는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에 따르면) 분절된 색조, 즉 두 색의 면을 나란히 놓고 시각적으로 충돌이 일어나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색에 대한 탐구는 뉴턴의 광학이론에서 괴테와 셰브뢸의 색채이론을 통해 후기 인상주의 미술가들에게 장착되었고, 그들은 기존 회화의 구성적, 구상적, 입체적 특징을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색채에 집중했다. 세잔과 고흐의 경우에는 특히나 색채의 위계가 다른 어느 회화요소보다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 그리고 보색 관계가 생기는 곳에서 발행하는 시각적 폭발성을 적절히 사용하여, 기존 회화에 꺼리던 '보색'사용에 대한 봉인을 해제했다. 이 두 미술가는 구성적 요소에 억눌려있던 색채를 해방시켰고, 이러한 색채에 대한 관심은 인상주의자들의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고흐는 자신이 머물던 아를의 침실을 시리즈로 그렸다. 이 연작에 대해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그의 의도를 명확히 드러낸다.
<이번에는 단순히 내 침실을 재현한 것일 뿐이야. 하지만 이 부분에는 색이 풍부해야 하며, 단순화를 통해 사물에 적용된 스타일에 웅장한 정도를 더해 특정한 휴식이나 꿈을 암시하지. 글쎄, 구도를 볼 때 우리는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을 멈춘다고 생각해. 벽은 옅은 보라색으로 칠했고 바닥은 체크무늬 소재야. 나무 침대와 의자는 신선한 버터처럼 노랗고, 시트와 베개는 레몬빛 녹색이야. 침대보는 주홍색이고, 창문은 녹색이야. 세면대는 주황빛이고, 물병은 파란색이야. 문은 라일락색이고 그게 전부야. 닫힌 덧문이 있는 이 방에는 다른 것이 없어. 정사각형 가구는 흔들리지 않는 휴식을 표현해야 해. 또한 벽에 있는 초상화, 거울, 병, 몇 가지 의상도 마찬가지지. 그림에는 흰색이 적용되지 않았으므로 프레임은 흰색이 될 거야. 나에게 권장되는 의무적인 휴식과 동등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 어떤 종류의 그늘이나 그림자도 묘사하지 않았어. 크레페와 같은 단순한 단색만 적용했어.?
고흐는 이 방의 투시도법을 의도적으로 왜곡했다. 그가 말하듯 '구도'에 집중하면 '꿈'과 같은 환상적 효과는 감소된다. 고흐는 의도적으로 방의 구도를 무너뜨려 생경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낯선 분위기의 방의 구도는 관찰자가 색채에 주목할 수 있게 만들었고, 선명한 노랑과 붉은색 그리고 푸른색 벽체의 3 원색을 통해 방 안의 전체적인 색조를 구성했다. 구도와 색채의 어지러움은 자신이 겪고 있는 정신적 혼란과 세상에 대한 시각이 드러날 수 있지만, 치료를 필요로 하는 스스로를 위한 휴식의 장치로 정사각형의 의자와 액자 등의 가구를 배치했다. 가구는 정적인 도구로 방황하는 그의 정신에 안정되고 정지된 효과를 부여할 수 있다.
다양한 직업과 아마추어리즘으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독특한 커리어는 고갱이 독보적이다. 그의 예술관은 소설 <달과 6펜스>에서 서머싯 몸이 작화하기도 했다. 고갱은 해군 장교 후보로 장거리 항해를 하던 중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은행원으로 일하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다가 1882년 주식 시장의 붕괴를 계기로 화가로 전향하게 된다. 경제난에 파리를 떠나 방 값이 싼 브르타뉴로 이사하기도 하고, 1888년 고흐의 권유로 아를에 머물기도 한다. 당해 카리브를 방문하고 1891년 타히티에서 원주민의 삶을 관찰하던 그는 '원시주의(primitivism)'에 몰두한다.
<녹색 그리스도>와 함께 상징주의로 대표되는 <노란색 그리스도>는 고갱의 초기 작품의 특징이 나타난 작품이다. 인상주의에서 사라진 윤곽선이 또렷이 드러나고 예술의 몸과 배경에서 보이지 않는 음영은 전면의 여성들에게만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노란색의 배경은 예수의 육체를 나타내는 색과 일치하여 화면 전체의 평면성을 강조한다. '클루아조니즘(Cloisonnism)'이라 불리는 이 기법은 후기인상주의에서 주로 사용되는 것으로 고전주의에서 강조되던 음영을 통한 입체성을 포기를 의미한다. 클루아조니즘의 색상 분리는 세잔의 이중시점, 고흐의 구도왜곡과 함께 모더니즘의 특징인 불연속성울 나타내는 새로운 시도의 단적인 예다. 고갱은 슈페네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을 너무 문자 그대로 모방하지 마십시오. 예술은 추상입니다. 자연의 현존 속에서 꿈을 꾸듯이 자연으로부터 예술을 이끌어내고, 결과보다 창조 행위에 대해 더 생각하십시오.>
고갱은 세잔과 고흐와 함께 구상예술에서 추상예술로 전환되는 여러 가능성을 미리 보여주었다.
고갱의 타히티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 그는 타히티의 원주민의 생활을 본 후 문명에 대한 환멸을 느낀다. 지구 반대편의 원시 문명이 유린되고, 관광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원주민의 삶과 구경꾼의 안락함을 위해 착취당하는 원시 문명의 처절함에 대해 그는 '메스꺼움'을 느낀다. 조지 다니엘 드 몽프레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고갱은 소비의 대상이 된 원시 문명에 대한 회한을 전한다.
<모델을 찾기 쉬운 마르케사스에서(타히티에서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일) 그리고 탐험할 새로운 나라에서 - 간단히 말해서 새롭고 더 야만적인 주제에서 -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여기서 내 상상력은 식어가기 시작했고, 대중도 타히티에 익숙해졌지. 세상은 너무 어리석어서 누군가가 새롭고 끔찍한 요소가 담긴 캔버스를 보여주면 타히티는 이해할 수 있고 매력적으로 보일 게지. 내 브르타뉴 그림은 이제 타히티 때문에 장미수가 되었고, 타히티는 마르케사스 때문에 향수가 될 것이라네.>
소비자로서의 대중은 원시문명을 단지 구경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이국적(exotic)인 것은 단지 유행과 같은 유희의 대상일 뿐이다. 유행이 지나가듯 타히티에 대한 관심은 식어갈 것이고, 문명인들은 또 다른 이국적 공간을 찾아 헤맬 것이다. 고갱은 타히티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사랑했다. 그는 <언제 결혼할까?>라는 작품의 이름을 지을 때에도 원어민의 언어를 배워 명명했다. 원주민 여성에 대한 묘사 역시 원주민의 미술의 특징을 최대한 살려서 표현했다. 원주민에 대한 '야만'이라는 꼬리표에 대해서도 고갱은 '문명의 야만성'에 대해 지적하며 반박한다. '야만성'은 원시에도 문명에도 존재한다. 고갱은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에서 백인의 아담 대신 원주민의 남성을 배치하여 인류의 보편적 종교성에 대해 그린다. '야만성'이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인 것처럼 선과 악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보편적 상대적일 뿐이다. 고갱의 1903년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선한 사람은 없고, 악한 사람도 없다. 사람들은 양면을 가진다. 같은 방식으로,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너무나 사소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일들과 일상적인 일들을 할 시간은 있다.>
스위스의 상징주의 화가이자 아르누보 화가인 호들러는 안타까운 초년을 보냈다. 6남매였던 그의 형제들은 그를 제외하고 어린 시절을 넘지 못하고 모두 사망했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난 후 12세의 나이에 아버지의 목수 작업장을 이어받아 일하기 시작했다. 옛 거장들은 연구하고, 코로와 쿠르베 같은 당대 화가들을 동경하던 호들러는 1878/9년 스페인으로 여행하여 벨라스케스, 티치아노, 라파엘로, 루벤스 등의 거장의 작품을 마주한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세 작품으로 금메달을 수상한 후 명성을 쌓게 되고 빈과 베를린의 분리파 회원이 되어 경제난으로부터 탈출하게 된다. 1904년에는 뮌헨의 분리파에 가입하게 되지만 1914년 랭스 대성당 포격에 대한 반대 청원서명에 참여하여 독일의 잔혹행위를 비판한 연유로 독일 예술 협회에서 추방되게 된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자신의 삶과 당시 스위스에 만연한 '죽음'과 '삶'을 주제로 삼는다.
호들러의 <밤>에는 여섯 명의 잠든 인물이 보인다. 이들 인물들은 모두 수평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수평적 배치를 통한 구성으로 호들러는 '평행주의(Parallelism)'로 불린다. 이러한 수평적 구조는 정적이고 고요함을 나타내므로 '죽음' 혹은 '밤'의 이미지를 잘 구현한다. 화면의 중앙에 놀라며 깨어나는 남자는 호들러 자신을 닮아있다. 그의 검은 천 속에서 사람의 형성처럼 부풀어 오른 무언가가 그를 위협한다. 이 검은 형상은 '죽음'을 상징하고 그것은 현실이 아닌 꿈일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조차 공포로 다가온다. 이 상징적 죽음이 위치한 곳은 남성의 중심부이므로 성적인 상징을 내포한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화면 전면의 왼편과 오른편의 여성들은 호들러의 연인을 나타낸다. 호들러의 그림에서 여성은 조화와 생명을 상징하는데 이들은 모두 잠들어 있다.
한편 호들러는 당해 <낮>을 발표한다. <밤>과 같이 인물들은 수평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평행주의'는 인간 사회의 대칭과 리듬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균일한 간격을 통한 일종의 의식을 행하는 장면을 나타낸다. <밤>과 다른 점은 이들 인물이 수직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평성이 죽음을 나타낸다면 수직성은 생명을 나타낸다. 이집트의 앙크가 수평의 땅을 관통하는 식물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과 유사하다. 조화와 생명을 상징하는 여성들이 잠에서 깨어나 낮을 찬양하고 있다.
19세기 후반의 여러 예술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전통적 회화와 인상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규범을 찾아 나선 구도자와 같았다. 건축에서의 새로운 재료와 장식에 대한 시도, 세잔, 고흐, 고갱으로 대변되는 회화에서의 실험은 20세기에 이어지는 무수한 실험의 원천을 제공했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은 시도 자체만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도 완결성을 띤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