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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Nov 26. 2024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25장 -3

끝없는 변혁 - 19세기

[에드가 드가 (Hilaire Germain Edgar de Gas, 1834-1917)]

드가는 앵그르의 제자 루이 라모트(Louis Lamothe, 1822-1869)에게 수학한 프랑스의 화가이자 조각가이다. 1855년 에콜 드 보자르에서 잠시 교육을 받았으나 갑갑함을 느끼고 박물관과 미술관을 돌며 독학으로 자신의 예술을 찾아갔다. 1856년 이탈리아 여행 중 나폴리와 로마를 방문하고 1858년에는 피렌체를 여행하며 고전시대 거장들의 걸작을 직접 목도했다. 1870년에서 1871년까지 보불전쟁 중 파리 포병으로 근무했고, 1872년에서 73년까지 미국의 뉴올리언스의 친지를 방문한다. 이 시기에 그는 사회의 불합리에 의해 소외된 자들에 대한 시각을 갖게 된다. 소외와 단절은 드가가 일생동안 다루는 핵심 주제가 되고, 초상화를 작업하는 동안에도 대상의 심리적 관찰에 주목한다. 그의 캔버스에는 주로 파리의 소외된 여성들, 즉 세탁부, 매춘부, 무용수 등이 등장한다.

왼편: <마드무아젤 마리 디우(Marie Dihau)>, 에드가 드가, 1867-68; 오른편: <오페라 오케스트라>, 에드가 드가, 1870년경

마리 디우(1843-1935)는 프랑스의 가수, 피아니스트였다. 프랑스의 북부도시 릴(Lille) 출신인 그녀는 음악가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파리와 릴을 오가며 엄청난 스케줄을 소화했다. 10살 연상의 친오빠 데지레는 파리 오페라의 바순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그녀에게 노래와 피아노를 가르쳤고, 보불전쟁 이후 그녀는 데지레와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1909년 데지레가 죽은 후까지 미혼이었던 노년의 마리 디우는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기 위해 준비하는 소녀들에게 무료로 음악 레슨을 제공했다. 1922년 궁핍해진 그녀는 드가가 그린 첫 번째 초상화(1867-68)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판매한다. 1923년 또다시 돈이 필요해진 그녀는 드가의 두 번째 초상화 <마드무아젤 디유와 피아노>(1869-1872)와 데지레가 그려진 <오페라 오케스트라>를 분리시키고 싶지 않아, 두 그림을 룩셈부르크 박물관에 사용권과 임대료 12,000프랑에 넘겼다. 초상화 <마드무아젤 마리 디우>에서 파리와 릴을 오가는 기차 안에서의 마리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멋진 가방과 음식들 뒤에 어두운 표정의 프로필(옆모습)은 그녀의 지친 내면을 잘 보여준다. 드가는 그녀의 주변 배경을 거친 붓질로 작업하여 그녀에게로 모든 초점을 모으는 효과를 만들어 낸다. 빛은 그녀의 귀 주변을 밝게 비추는데, 귀는 입과 달리 수동적 기관임을 감안하면 그녀의 수동적 삶의 형태를 나타낸다고 해석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마리의 얼굴은 어둠에 싸여 그녀의 내면의 어두움, 화려한 공연 후의 지쳐버린 내면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오페라 오케스트라>에서는 그녀의 친오빠 데지레가 화면 중앙에 등장한다. 바순을 불고 있는 콧수염의 신사는 오케스트라 피트에 있는 14명의 음악가 중 단연 주인공으로 그려졌다. 오페라에서 주인공 격인 무용수는 화면 상단에서 잘려있다. 드가는 오페라를 구성하는 핵심적 역할을 하지만 공연 감상자들에게는 숨겨져 있는, 즉 소외된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술사학자 찰스 스터키는 발레를 감상하는 산만해진 관객의 관점과 비교하며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다.


<드가의 매력은 움직임에 대한 묘사, 즉 무작정 흘끗 보는 동안 관객의 눈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전적으로 '인상주의자'이다.>


<발레 수업>, 에드가 드가, 1874-76

드가는 발레 무용수를 그리는 화가로 이름을 알렸다.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일부에서 등장하는 발레의 모습을 포함하여 총 1,500여 점의 발레  작품을 만들어냈다. 드가는 절대적 완벽함을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는 반복된 연습을 해야 하는 무용수의 고통에 연민을 느꼈다. 드가는 무용수가 입는 옷과 신, 장신구 등의 모든 부분에 관심을 기울였고, 연습 과정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들을 좋아했다. 따라서 공연의 모습뿐 아니라 리허설 장면에 대한 묘사를 더욱 선호했다. 신체에 대한 연구 부분에서도 움직이는 무용수를 연구한 것은 드가가 최초이다. 그림에서 지팡이에 몸을 기댄 은발의 노인은 쥘 페로(Jules Perrot, 1810-92)로 무용수이자 안무가이다. 그는 19세기를 대표하는 안무가로 러시아 상페테르부르크의 제국 마린스키 발레단의 발레 마스터에 오른 입지적 인물이다. 노년에 여유로운 생활을 위해 파리로 돌아와 어린 무용수를 가르쳤다. 노년의 마스터는 어린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지도하고 있고, 뒤편의 무용수들은 각자의 연습을 하거나 옆 친구들과 수다를 떨기도 한다. 화면의 왼쪽에 있는 어린 무용수는 왼손으로 등을 긁고 있는데, 이런 장면에서 알 수 있듯 드가는 이상적인 발레 무용수의 모습을 그리거나, 연습 장면의 고통만을 나타내려 하지 않는다. 그는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그들의 삶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기고 있다. 드가가 보여준 새로운 시각은 일반적인 주연과 조연의 관계에 대한 가치의 전도를 이루어냈고, 즉흥적이고 예외적이며 한눈팔기와 같은 '우연적인' 시선을 회화의 관점으로 가져왔다. 인상파 화가들의 아버지 카미유 피사로는 그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평했다.


<드가는 확실히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다.>


[오귀스트 로댕 (François Auguste René Rodin, 1840-1917)]

고전주의 조각의 해부학적 완벽함과 바로크 조각의 운동성과 역동성에 새로움을 더할 조각은 로댕과 함께 등장했다. 현대 조각의 창시자라 불리는 로댕의 조각은 복합적이고 격동적이며 깊이 파인 포면을 특징으로 한다. 당시 조각풍과 다른 독창적인 표현과 주제로 비평가들로부터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그는 자연주의적 인체묘사를 목표로 삼았는데, 기존 조각이 기념비적 표현에 주목하고 있을 때 로댕은 대상의 감정과 성격 그리고 신체성에 관심을 두었다. 1875년 이탈리아 여행을 하던 중 자연주의에 눈을 뜬 로댕은 구체적이고 질감 있는 표현, 빛과 그림자의 상호작용으로 감정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왼편: <죽어가는 노예>, 미켈란젤로, 1513-16; 가운데, 오른편: 청동기 시대, 오귀스트 로댕, 1875/16, 1876/77

청동기 시대라 불리는 로댕의 작품 시기는 그가 이탈리아 여행 시기와 겹친다. 자세와 구도 모두 미켈란젤로의 <죽어가는 노예>를 연상시킨다. 생동감 있는 주물 조각은 충격적이었고, 주물 속에 사람을 넣었다는 괴소문이 돌았다. 괴소문은 로댕의 작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고조시키기도 했다.

왼편: <생각하는 사람>, 오귀스트 로댕, 1904; 오른편: <지옥의 문>, 오귀스트 로댕, 1880-1917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갔던 프로젝트 <지옥의 문>의 일부다. 단테의 '신곡'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지옥의 문>은 신곡의 첫 부분인 지옥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높이 6미터에 폭 4미터의 거대한 조각에 등장하는 인물은 180여 명이나 된다. 지옥의 입구를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단테가 묘사한 문장에 걸맞는다: <여기에 들어오는 사람은 모든 희망을 버려라.> 프랑스의 신문 <le matin>에서 로댕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나는 단테와 함께, 오직 단테와만 함께, 그의 지옥의 여덟 개의 원을 그리는데 1년을 보냈다.... 올해 말까지 나는 내 그림이 단테에 대한 나의 비전을 표현했지만, 그것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내 모델을 가지고 자연에서 작업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했다.>


끔찍한 지옥의 모습을 표현함에 있어서도 허구의 것이 아닌 실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의 표현을 실험하고 관찰하여 완성했다. 원죄를 뜻하는 세 남자와 지옥의 입구 사이에 위치한 <생각하는 사람>은 고뇌에 빠져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로댕은 삶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여러 유혹과 나태함으로 말미암아 펼쳐질 지옥과 같은 모습을 현실성 있게 묘사했다. 관찰자는 눈앞에 펼쳐진 상상할 수 있는 만큼의 끔찍함을 통해 죄과에 대한 벌을 외면할 수 없게 된다.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명명하기 전 로댕은 이 작품을 <시인>이라고 잠정적으로 명명했었다. 시인 단테를 지칭하는 듯한 이 제목은 삶에 대해 관조하는 은유적 표현으로서 모든 인간이 시인, 사상가 혹은 예술가와 같은 고뇌를 품고 살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고뇌는 삶 속에서 지옥을 마주하고, 저항하고, 패배하고, 다시 일어서는 반복된 투쟁이다.

왼편: <신의 손>, 오귀스트 로댕, 1898년경; 오른편: <생각>, 오귀스트 로댕, 1895년경

로댕이 남긴 위대한 예술적 성취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non-finito', 즉 미완성이라는 개념을 조각에서 구현한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노예 연작을 통해 미완성의 작품이 노예의 구속상태를 더욱 잘 표현한 것이라는 훌륭한 '미완성적 완성'을 보여준 이후 로댕은 미켈란젤로의 길을 따른 첫 번째 조각가이다. 미켈란젤로는 돌 속에 형태가 이미 존재했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조각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마무리되지 않은 외관이 관찰자에게 주는 상상력의 여지를 로댕은 가벼이 생각하지 않았다. 로댕은 미완성이 그대로 완성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필수 형태는 거기에 있는데, 만약 내가 작품을 좀 더 외양적으로 완성했다면 그것들은 더 이상 거기에 없을 것이다.>


로댕이 보기에 인간은 늘 완성될 수 없는 미완의 존재다. 고뇌하는 '생각하는 사람'도 그의 연인 카미유 클로델을 모델로 삼았던 '생각'에서의 고뇌하는 여인도 모두 이루어지지 않은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필멸의 존재로 죽어가며 동시에 영원을 바라고, 욕망하여 죄를 짓는 동시에 죄 사함을 바라기 위해 기도를 하는 이 모순적인 인간이라는 동물은 로댕 자신의 모습이었고, 그는 이러한 인간의 면모를 사랑한 듯하다.


<실제로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욕망으로 죽어가고 그 열정을 가라앉힐 은혜를 헛되이 구하는 미친 짐승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없다.>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James Abbot McNeil Whistler, 1834-1903)]

미국인 철도 엔지니어 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휘슬러는 아홉 살 되던 해에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했다. 아버지가 콜레라로 죽은 1848년 휘슬러는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귀국한다. 이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규율을 지키는 것을 힘들어해 3년 만에 제명당한다. 1855년 파리로 이주하여 드로잉 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미술을 배우기 시작한다. 경제적인 문제가 생긴 휘슬러는 보헤미안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는 독학을 선호했고, 카페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던 중 쿠르베와 앙리 팡탱-라투르를 사귀게 된다. 휘슬러는 이 시기에 <선은 색보다 더 중요하고 검정은 음조 조화를 위한 기본 색이다.>라고 말했다. 이후 오스카 와일드와 매우 가까운 사이로 지내다가 와일드의 미학 이론에 대한 견해 차이로 반목하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 등장하는 바질 홀워드는 휘슬러를 모델로 삼은 캐릭터다.

<회색과 검은색의 배치, 미술가의 어머니의 초상>,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1871

휘슬러는 <회색과 검은색의 배치>라는 이상한 이름의 작품을 완성한다. 당시 빅토리아 시대의 관객들에게 이런 제목은 거부감이 컸기에 <미술가의 어머니의 초상>이라는 이름이 덧붙여졌다. 하지만 휘슬러가 제목을 붙였듯 그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어머니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원래 오기로 한 모델이 도착하지 않아 67세의 어머니께 모델을 부탁했고, 안나 여사가 다리가 불편하여 서있을 수 없다고 하자 의자에 앉은 채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휘슬러는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를 지지한 예술가로 '진정한 예술은 규훈적, 도덕적, 정치적 혹은 모든 사회적 가치와 실용적 기능과는 무관하다'는 철학을 가졌다.


"예술은 모든 허튼소리에서 독립되어야 한다.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하며... 헌신, 연민, 사랑, 애국심 등과 같이 그것과 전혀 다른 감정과 혼동하지 않고 눈이나 귀의 예술적 감각에 어필해야 한다."


하지만 이 그림은 이후 가족적 가치를 상징하기 위한 용도로 주로 사용되었다. 휘슬러는 이 작품을 초상화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단지 회색과 검은색의 배치를 통한 느낌을 그리고자 했다. 마치 달을 가리키는 화가와 달리 손가락만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에 휘슬러는 1890년 자신의 저서 '은근하게 적을 만드는 기술(The gentle Art of Making Enermies)'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왕립 아카데미에 "회색과 검은색의 배열"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된 제 어머니의 사진을 보세요. 이게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제 어머니의 사진으로서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대중이 초상화의 정체성에 대해 어떻게 신경 쓸 수 있고 신경 써야 할까요?>


휘슬러의 이러한 날 선 태도는 영국의 예술 평론가이자 사회운동가 존 러스킨 (John Ruskin, 1819-1900)과의 소송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러스킨이 휘슬러의 작품에 대해 혹평하자 휘슬러는 지금까지 자신에 대한 가장 저속한 비난이라며 명예훼손으로 러스킨을 고소한다. 1878년 휘슬러는 러스킨의 변호사 존 홀커 경과 다음과 같은 공방을 나눈다.


홀커: 흑금색으로 녹턴을 칠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나요? 얼마나 빨리 끝냈나요?

휘슬러: 아, 저는 아마 이틀 안에 하나는 끝낼 겁니다. 하루는 일하는 데, 하루는 마무리하는 데...

홀커: 이틀 동안 일하는 데에 200 기니를 요구하시는 겁니까?

휘슬러: 아니요. 저는 평생의 작업을 통해 얻은 지식에 대해 요구합니다.


왼편: <푸른색과 금색의 야상곡 - 오래된 배터시 다리>, 휘슬러, 1872-75; 오른편: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 떨어지는 로켓>, 휘슬러, 1872-77

러스킨과의 소송에 언급된 것이 위 야상곡들이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의 작품은 파란색, 초록색, 노란색의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제한된 색상의 사용은 차분한 느낌을 조성하고 피어오르는 회색의 연기는 물과 하늘의 경계를 명확히 해주며, 노란 불빛과 점들은 불꽃처럼 폭발하고 타오르는 생동감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휘슬러는 이러한 색상과 톤이 주는 효과를 통해 어떠한 서사를 이끌어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그림이 어떠한 서사를 담는 것을 '문학에 대한 과도한 소비'라고 비판한다. 휘슬러는 단지 이 장면 혹은 순간이 특정 감각을 만들어내기를 원할 뿐이다. 휘슬러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 장면을 통해 특정 메시지 하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경험이 어떠한 뉘앙스와 함축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칸바라>, 우타가와 히로시게, 1833-34

휘슬러는 자신의 야상곡이 일본의 판화가 히로시게의 영향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히로시게의 판화 <칸바라>는 겨울이 주는 추위, 그리고 밤이 주는 적막하고 외로움을 잘 드러낸다. 오른쪽으로 두 명, 왼쪽으로 한 명이 사람이 중간에서 흩어져 가는 발자국은 겨울밤의 적막함과 외로움이라는 뉘앙스를 충분히 전해준다.


19세기말에 벌어진 여러 예술가들과 그들이 모인 일련의 그룹들의 시도들은 기존 예술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변혁을 의미한다. 앵그르와 들라크루아가 지키고자 했던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끝으로 바르비종파와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의 효과에 대한 직접적 관찰과 자연 속에서 찰나의 인상을 남기고자 한 기법적, 사상적 시도를 감행했다. 라파엘 전파와 같이 기존 문법의 전통을 비판하고 그것이 시작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복고주의는 건축에서 '고딕 부흥'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신의 관심 분야에 따라 자연, 도시, 산업화, 도시 속의 인파, 무용수 등 다양한 주제를 발굴하기도 했다. 로댕은 조각에서 미켈란젤로를 이어받아 고전주의와 바로크의 한계를 뛰어넘었으며, 휘슬러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개념을 장착하여 특정 경험이 주는 뉘앙스를 전달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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