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변혁 - 19세기
한편 영국에서는 1844년 15세의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96)가 영국왕립아카데미에서 윌리엄 홀먼 헌트,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와 함께 라파엘 전파 형제단(Pre-Raphaelite Brotherhood, PRB)을 결성했다. 라파엘 전파는 보티첼리,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이후 매너리즘 화가들이 기계적인 원칙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것에 염증을 느껴 라파엘로 이전, 즉 트레첸토(Trecento, 1300년대)와 콰트로첸토(Quattrocento, 1400년대)의 이탈리아 미술의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화풍을 되살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특히 로세티는 시인이자 과학자였던 아버지를 두었고, 그가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를 존경하여 아들에게 단테라는 이름을 주었다. 라파엘 전파는 라파엘로 이전 회화의 명확성과 엄격함에 매료되었고 이를 위해 선언문을 발표한다.
<표현할 수 있는 진정한 아이디어를 갖기 위해;
자연을 주의 깊게 연구하여 자연을 표현하는 방법을 아는 것;
기존 예술의 직접적이고 진지하며 진심 어린것에 공감하고,
관례적이고 자기 패러디적인며 암기적으로 배운 것을 배제한다.
무엇보다 철저하게 좋은 그림과 조각을 제작하는 것>
그들은 시인이자 화가인 로세티를 중심으로 그들의 의지를 확고히 했다. 로세티는 같은 영국 출신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를 존경했고 그의 가치를 재발견하는데 이바지했다. 그들은 회화에 대한 학문적 관행에 반대했고, 당시 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던 '고전적' 회화를 비판했다. 이러한 예술에 대한 학술적 접근에 대한 비판은 프랑스에 여러 화가들에게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진다.
현대 회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화가는 여럿 있으나, 결코 빠지지 않는 예술가는 에두아르 마네다. 많은 근대 회화의 거장들의 공통점은 자신만의 미술을 찾기 위해 엘리트 코스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네는 아카데미 드 보자르에서 클래식 교육을 받기를 바랐던 아버지와 달리 예술가와 함께하는 스튜디오에서 배우기를 원했다. 하지만 당시 나름 진보적이었던 성공한 예술가 토마스 쿠튀르도 마네의 눈에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고, 그의 불만족은 심각한 갈등으로 이어져 불과 6개월 만에 스튜디오를 나오게 된다. 그는 루브르로 가서 직접 거장들의 작품을 보며 습작하기 시작했다. 또한 암스테르담 (1852), 카셀, 드레스덴, 프라하, 빈, 뮌헨(1853) 등을 여행하며 그곳의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을 직접 연구했다. 루브르에서 그에게 큰 영감을 준 티치아노와 틴토레토의 고장인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로마와 피렌체(1853 가을)까지 여행을 하며 티치아노와 여러 거장들의 작품을 습작했다. 파리로 돌아와 2년마다 열리던 살롱전에 1859년 처음으로 참석하게 되었고, 그는 벨라스케스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전시했다. 1861년에는 렘브란트와 프란스 할스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전시하며 살롱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1865년 문제작 '올랭피아'로 살롱에 화재를 불러온다.
마네의 <올랭피아>에 영향을 준 작품으로는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 (1510)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꼽힌다. 이 가운데 마네가 여행 중 습작했던 티치아노의 그림이 좀 더 마네의 그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벌거벗은 여인은 오른팔을 베개 위에 두어 상체를 지탱하고 왼팔로 중요부위를 가리고 있다. 티치아노의 작품에서 보이는 수직성을 주는 진녹색의 커튼이 <올랭피아>에서도 발견된다. 여신 비너스의 나체가 '아름다움'의 은유적 표현이라면, 올랭피아의 나체는 은밀함과 에로틱함 그리고 방탕함을 뜻한다. 비너스의 오른쪽 뒤편으로 두 여성은 여신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고, 그녀의 발 언저리에는 충성과 믿음을 상징하는 강아지가 누워있다. 여신의 우아함을 상징하는 진주 귀걸이는 나체의 여성의 이미지를 여신의 아름다음으로 이끈다. 반면 올랭피아의 오른편에는 흑인 여성이 누군가가 보낸 꽃다발을 들고 있으며, 화면의 오른쪽 끝에는 마녀를 상징하는 검은 고양이가 등을 펴고 꼬리를 치켜든 흥분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녀의 오른발 앞에는 벗겨진 판토펠이 성적 암시를 주고 있고, 왼쪽 귀에 꽃은 난초는 최음제를 상징한다. 그녀가 창녀로 해석되는 또 다른 부분은 목에 묶인 리본이다. 그녀는 어딘가에 구속되어 있고 자유롭지 못한 상태라는 은유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녀의 창백한 피부는 티치아노의 비너스가 뿜어내는 생동감 있는 살결과 다르다. 얼룩이 뭍은 것 같은 색조와 대비되는 붉은 화장의 얼굴은 관능미보다는 외설적이라는 평가를 받게 했다. 프랑스의 평론가 아메데 캉탈루브(Amédée Cantaloube, 1830-1883)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전에 우리는 이렇게 냉소적인 것을 본 적이 없다. '올랭피아', 일종의 검은색 테두리가 있는 고무로 만들어진 암컷 고릴라가 침대에 누워 티치아노의 비너스 자세를 흉내 내고 있다."
하지만 마네의 <올랭피아>는 비평가들의 이러한 날 선 반응과 반대로 동시대 혹은 이후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폴 세잔은 마네의 <올랭피아>를 최초로 오마주한 화가이고, 이어 폴 고갱, 에드가 드가, 파블로 피카소, 장 뒤뷔페, 르네 마그리트 나아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에 이르는 현대의 작가들에까지 직접적인 헌정을 받았다. 비평가들에게는 호된 비난을, 예술가들에게는 '예술가의 예술가'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았고, 이러한 비평가와 예술가의 극단적 분리, 나아가 대중과 비평가 그리고 예술가의 인식의 괴리가 이미 시작되었다.
마네는 기존의 작품들에 대한 패러디 혹은 참조를 즐겼다. <발코니>는 고야의 <발코니의 마하들>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마네의 눈에 비친 고야의 그림은 자연에 대한 정직한 관찰이었다. 고전주의 화가들이 만들어낸 거짓스러운 빛의 효과는 자연의 그것과는 달랐고, 빛이 밝음과 어둠의 강렬한 경계를 만들어 준다는 것을 마네는 고야를 통해 되새겼다. 고야의 작품에서 앞의 두 여인은 뒷 배경의 남성들과 대조적으로 화사한 빛에 노출되어 있다. 두 남성과 여성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아 보이지만 빛은 그 거리를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실내와 실외라는 협소한 구분은 빛의 있음과 없음이라는 극단적 차이로 드러난다. 마네의 <발코니>는 화폭의 양 옆과 아랫 절반을 밝은 녹색의 프레임으로 제한한다. 윗 절반에 그림자 없는 얼굴의 세 인물이 삼각형 구도로 서있고, 앞의 두 여인의 하얀 옷은 고전주의자들의 명암 표현으로부터 자유롭게 빛난다. 남성이 입은 검은 옷은 그와 대조적으로 실내의 어둠으로 후퇴하여 남성의 와이셔츠와 얼굴이 유령과 같이 떠다니는 느낌을 연출한다. 남성의 뒤로 차를 내어오는 소년이 흐릿하게 어둠 속에 묻힌다. 실내는 극단적 어둠으로 가려져 어떠한 모습인지 인지불가능한 혼돈의 공간으로 그려져 있다. 자크 루이 다비드와 같은 고전주의자들은 어두운 배경이라 할지라도 인식 가능한 가능 낮은 한계선에서 표현할 법한 공간을 바로크와 낭만주의 화가들은 생략하듯 어두운 색채만 남길 것이다. 마네는 이 둘을 동시에 그려내는 기묘함을 선택했다.
“이 그림은 1869년 살롱에 전시되었다. 그는 현실적 기이함이라는 평판, 마네에게 붙은 괴짜스런 사실주의, 나쁜 취향에 대한 평판을 형성하는데 기여한 작품이다. “
1878년에 출판된 <19세기의 대사전(Grand dictionaire universel du XIXe siécle)>에는 위와 같은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당시 비평가들에게 느껴지는 '기이함', '괴짜스런', '나쁜 취향'과 같은 불협화음적 요소가 르네 마그리트에게는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의 진실을 드러내는 '신비로움'으로 느껴졌다. 미셸 푸코와 마그리트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나누었다.
푸코: "삶과 죽음, 빛과 어둠의 한계가 이 세 인물에 의해 드러납니다."
마그리트: "나에게 발코니의 배경은 관을 놓기에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여기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학문적 설명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설명은 타당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비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350년 전의 티치아노를 다시금 소환한다. 티치아노의 <전원 협주곡>에 등장하는 나체의 두 여성은 악기와 물병을 각각 손에 쥐고 있다. 스승 조르조네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고요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나타내며 전원의 아름다움을 하나의 협주곡과 같은 조화로움 모습으로 담아내고 있다. 류트와 플루트의 음악 소리, 물 붓는 소리와 바람소리, 뒤편에서 들려오는 양들의 소리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협주곡을 시각적으로 옮겨놓은 듯하다. 마네는 이러한 고전의 거장의 작품을 본떠 그린 듯한 인물의 배치를 가져오지만, 실상은 전혀 고요함과는 무관하다. 인물들의 전체적인 배치는 삼각형의 구도를 띠며 안정적인 고전적 틀을 유지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뒤편의 여성을 주목하자 원근법이 깨져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가는 의도적으로 뒤편의 여성을 삼각형의 꼭짓점에 두어 원근법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앞의 여성은 티치아노의 그녀들과 달리 관찰자를 응시하며 도발한다. 그녀 앞의 쓰러진 바구니와 굴껍데기는 성적인 암시를 하며 그녀가 고귀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아름다운 이유는 구도, 내용, 원근과 상관없는 색채의 배열과 빛의 효과 때문이다. 마네는 진정으로 비평가와 기존의 미술 질서에 대해 도발하고 선량한 척하는 도덕을 공격하고 솔직한 인간 사회의 모습을 고발한다. 이 작품에 대해 마네의 친구이자 위대한 작가 에밀 졸라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림에서 보아야 할 것은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아니라, 활력과 정교함, 전경이 너무 넓고 견고하며 배경이 '그렇게 가벼운 섬세함'을 지닌 전체 풍경입니다. 그것은 빛의 큰 부분으로 모델링 된 이 단단한 살, 이 유연하고 튼튼한 직물,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경에 녹색 잎 가운데 사랑스러운 흰색 점을 만드는 셔츠를 입은 여성의 실루엣입니다. 마침내 이 광활하고 공기가 가득한 앙상블, 이렇게 단순하게 표현된 자연의 한 구석, 예술가가 그 안에 있던 특별하고 희귀한 요소들을 모두 담아낸 이 감탄스러운 페이지 전체가 탄생했습니다
인상주의의 창시자는 클로드 모네다. 바르비종파와 함께 야외에 캔버스를 들고나가 현장의 인상을 화폭에 담으려 했던 모네는 회화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스스로 밝히는 바와 같이 자연과 그림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그림과 정원과 꽃 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1872년 르아브르(Le Havre)에서 전시된 한 작품으로 모네와 동료들은 평론가 루이 르로이(Louis Leroy, 1812-85)에 의해 조롱과 경멸이 섞인 말로 "인상주의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당시 평론가의 눈에 비친 그들의 그림은 미완성에 조잡하고 성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모네가 밝히듯 그들은 그들이 '인식한 것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식의 과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모네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어 보이는 화가는 영국의 윌리엄 터너다. 터너의 <주홍빛 일몰>을 보면 인상주의가 그에게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 확연히 드러난다. 강렬한 태양빛 대신 기호와 같이 추상화된 원형의 태양과 물에 비친 어른거리는 S자 모양의 빛의 꼬리, 배경은 그림자와 같이 흐릿하게 화면의 뒤편으로 물러나 있다. 하늘에 드리워진 일몰의 색조는 보색 대비와 불투명한 색채를 사용하여 재현이 아닌 인상을 관찰자에게 전한다. <인상, 해돋이>의 뒤편 배경은 증기선과 크레인이다. 당시 프러시아와의 전쟁(보불전쟁, 1870-71)에서 패배한 프랑스의 재건의 상징인 산업화를 나타내기에 르아브르 항구의 모습은 떠오르는 일출과 같이 희망적이었고,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나라의 새로운 힘과 아름다움에 대한 모네의 궁극적인 유토피아적 관점을 포함한다.
산업화의 상징은 증기기관차다. 모네는 산업화된 도시의 풍경을 자연이 주는 인상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시 모네가 생 라자르역에서 그림을 그리던 모습을 보던 위그 르 루는 1889년 이날을 회상했다.
“[모네]는 떠나는 기관차를 끈기 있게 그렸습니다. 그는 기관차가 주변에서 반짝이는 뜨거운 공기 속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역무원들이 방해했지만 그는 사냥꾼처럼 인내심 있게 앉아 있었고, 붓을 준비하고 캔버스에 페인트를 칠할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
'순간'은 인상주의자인 모네가 표현하고자 했던 '인상'의 시간이었고, 동시에 표준화된 시간의 중요성이 강조된 산업화의 시간이기도 했다.
모네와 함께 인상주의를 이끈 르누아르는 풍경화보다는 여성 누드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60년간 4,000여 점의 작품을 남길 정도로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에도 꾸준하고 부지런한 예술가였다. 마네와 모네처럼 르누아르도 루브르에서 작품을 습작하며 자신의 예술관을 키웠고, 모네와 시슬리와 함께 퐁텐블로에서 바르비종파와 만나고 작업했다. 1870년 극심한 경제난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살롱에 진출했다. 인상파 화가가 되기 위한 또 하나의 조건, 그것은 당대 비평가들의 혹평이다.
“기괴한 프레임, 기괴한 윤곽, 형태도 조화도 없는 색상의 충돌,
원근감도 없고, 그림도 없는 “
이러한 혹평은 그를 관습적 예술의 틀을 때도록 부추겼다.
모네가 프랑스의 자연과 산업화의 장면들에서 순간의 '인상'과 빛의 효과를 탐구했다면 르누아르는 파리의 군중들 속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바토의 페트 갈랑뜨(Fête galante)의 영향으로 다수의 인물과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했고, 네덜란드 풍속화를 연상시키는 일상의 모습을 담은 그의 화풍은 자세히 살펴보면 얼룩덜룩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은 나무의 잎들 사이로 떨어지는 빛이 군중 위로 쏟아질 때의 빛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나의 광원이 선명한 명암을 만들어내는 고전주의의 문법에는 없는 상황이다. 화면의 정중앙에 위치한 부인의 이마에 비친 은은하지만 분명한 빛의 흔적, 그녀가 어깨에 손을 올린 흰색과 하늘색의 스트라이프 드레스를 입은 여성의 어두운 얼굴의 입 주변의 화사함은 나뭇잎 사이를 통과하며 간섭과 반사를 받은 빛의 효과다.
<물랭 드 갈레뜨의 무도회>와 함께 르누아르의 걸작으로 꼽히는 <보트파티의 점심식사>에서도 광원과 빛의 효과에 집중해 보자. 빛은 차양막 끝자락, 즉 화면의 왼편으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들어온다. 하지만 그늘을 만들기 위한 차양막의 영향으로 빛은 반사와 번짐을 통해서 공간을 비출 수 있다. 왼편의 밀짚모자를 쓴 남성의 얼굴과 가슴에는 빛의 효과가 거의 없다. 반면 오른편 앞쪽의 남성(카이유보트로 여겨짐)의 이마와 손가락에는 선명한 밝음이 관찰된다. 이 남자를 바라보는 두 여인의 얼굴 중 꽃장식을 모자에 두른 여인은 오른쪽 뺨 부분에만 은은한 빛이 서릴 뿐이다. 전체적인 색조는 파스텔톤의 부드럽고 조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탁자 위의 흰색 천이 반사광을 만들어 전체적인 조도를 높이는 근거를 만들어준다. 식탁 위의 유리 제품들에 맺히는 빛의 몽우리들과 과일의 반짝임이 생동감을 부여한다. 비평가 아르망 실베스트르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낸다.
“르누아르가 그린 최고의 작품 중 하나 … 완전히 놀라운 그림이 있는데, 선이 아니라 색조의 병치로 만들어진 그림 – 진정한 그림 -이다.”
인상주의 화가의 최고령인 카미유 피사로는 쿠르베와 코로 등의 위대한 예술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2살에 잠시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배운 적이 있지만 16세 이후 아버지가 자신의 사업을 이어받기를 원해 5년간을 휴식시간과 퇴근 후에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1855년 25세가 되던 해 피사로는 파리로 돌아와 에콜 드 보자르와 아카데미 쉬스(Académie Suisse)를 다녔으나 마네와 마찬가지로 교육 과정에 불만을 갖고 코로를 찾아가게 된다. 1859년 전시된 작품은 그의 스승인 코로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었고, 코로는 그에게 '외광', 즉 야외에서의 빛의 효과에 대단 큰 가르침을 주었다. 피사로는 쿠르베와 코로에 의해 "진실한 진술에 대한 그림", 즉 사실주의적 가치를 깨우쳤고, 밀레를 통해 "시골 생활에 대한 감상적 묘사"에 관심을 가졌다. 아카데미 쉬스에서 친분을 맺은 모네, 세잔과 함께 기존 살롱에 대한 불만을 공유했고 자신만의 예술을 찾아갈 의지를 다진다. 세잔은 피사로를 "아버지와 같은 사람"으로 기억했고, "선한 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르누아르는 "인위적이거나 위엄 없이 자연 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기록하는 등 피사로에 대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평가는 "지혜롭고 균형 잡혔으며, 친절하고 따뜻하다"는 의견이다.
마네와 르누아르와 달리 피사로는 대도시의 풍경에 주목했다. 코로의 풍경에 대한 가르침과 대도시에 대한 관심이 융합된 듯하다. 그는 대도시의 정리 정돈된 길거리와 이동하는 마차와 사람들, 가로수를 마치 비 내리는 창문을 통해 보듯 낭만적으로 그려냈다. 특히 <밤의 몽마르트르 대로>는 거의 사라진 형체들에도 불구하고 임파스토 기법을 통한 색채의 면들이 도시의 분위기에 대한 '인상'을 독특하게 전한다. 피사로는 끊임없는 시도로 동시대 화가들의 존경을 받았다. 1884년부터 1888년까지 4년 동안 아르망 기요맹(Armand Guillaumin, 1841-1927), 폴 시냑(Paul Signac, 1863-1935)과 함께 신인상주의를 시도한다.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1859-1891)의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본 피사로는 고전 인상주의에 기법에 대해 재고하게 되었고, 감각을 직관적 기법으로 표현하는 대신 외젠 쉐브렐(Eugène Chevreul, 1786-1889) 과학적 색상이론에 대해 공부한다. 점묘법이 가진 색의 지저분한 혼합에 대한 해결책을 받아들여 <에라니의 건초 수확>에서와 같은 화사한 표현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불과 4년간의 실험 후 신인상주의에 대한 스스로의 소회를 밝혔다.
<4년 동안 이 이론을 시도해 본 후 포기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신인상파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내 감각에 충실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따라서 생명과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도 불가능했으며, 자연의 무작위적이고 감탄스러운 효과에 충실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내 그림에 개별적인 특성을 부여하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포기해야 했습니다.>
이후 피사로는 다시 인상주의 화풍으로 복귀하여 도시의 전망을 그리는데 주력했다. 그의 고집 센 용기와 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지속하려는 끈기는 그를 "성실함"으로 평가하게 했고 그에게 "인상주의자들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부여했다.